샤흐트

샤흐트

다른 표기 언어 (Horace Greely) Hjalmar Schacht
요약 테이블
출생 1877. 1. 22, 독일 팅레프
사망 1970. 6. 4, 뮌헨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재정 전문가.

1922~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을 뒤흔들었던 파괴적인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킴으로써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하에서는 경제장관직(1934~37)을 역임하기도 했다.

샤흐트는 1908년 드레스드너은행의 부행장으로 임명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전반기였던 1914~15년에는 브뤼셀에서 독일 점령정부를 위한 재정고문으로 일했다. 1916년에는 독일국립은행 총재로 임명되었고, 은행이 합병됨에 따라 계속해서 다름슈테터 국립은행의 총재를 맡았다. 1923년 그는 재무부의 특별통화위원 자격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마르크 화(貨)를 안정시키기 위한 엄격한 통화정책을 실시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독일의 선도적 금융기관인 독일 제국 은행 라이히스방크 총재로 임명되었다. 이후 1929년에는 독일의 배상금 지불문제로 파리에서 열린 협상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해, 회담의 주요안건이었던 영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샤흐트는 1930년 라이히스방크 총재직을 사임하고 독일 우익정당들과 동맹을 맺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인 1933년 1월 다시 라이히스방크의 총재로 재임명되어 1934~37년 독일 경제장관 재임시에도 총재직을 겸했다. 샤흐트는 당시 경제장관으로서 나치의 실업과 재군비 계획에도 책임이 있었으나, 1936년부터 독일 경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헤르만 괴링과의 경쟁 관계로 인해 결국 장관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뒤이어 1939년에는 히틀러의 재군비 지출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라이히스방크 총재직에서도 해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결국은 석방되어, 이후 뒤셀도르프에서 직접 은행을 설립하고 여러 나라의 재정고문을 맡아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