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회

삼부회

다른 표기 언어 Etats-Generaux , 三部會

요약 삼부회는 3계급, 즉 프랑스 혁명 이전 소수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민중을 포괄하는 제3신분의 대표로 이루어졌다. 3계급 대표의 최초 전국회의는 1302년 4월 소집되었다. 삼부회는 15세기말 그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제도화되지는 못했다. 루이 13세 때 소집된 1614년 삼부회는 상충되는 이해관계 때문에 3계급이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다는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 이후 마지막으로 열린 삼부회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무렵 재정적 위기와 광범위한 소요사태, 왕권 약화를 배경으로 소집되었다. 개혁을 위한 노력이 두 특권층에 의해 번복될 것을 우려한 제3신분 대표들은 혁명적 국민의회를 소집했다. 이로써 전통적 사회 계급을 토대로 한 대표제는 종식되었다.

삼부회
삼부회

프랑스 혁명 전 3가지 신분, 즉 소수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대다수의 민중을 포괄하는 제3신분의 대표로 이루어졌다.

삼부회의 기원은 13세기의 합동대표제의 발전과 국왕에게 자문과 원조를 하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 신분 대표의 최초 전국회의는 1302년 4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항하는 단려왕 필리프 4세를 돕기 위해 소집되었다. 14세기 전반에도 정치적·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이와 유사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백년전쟁 기간에 이미 삼부회는 단지 왕에게 고분고분히 동의하는 제도적 장치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 회의는 1350년대에 행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부르주아 개혁가 에티엔 마르셀이 암살되고 지방간의 불화가 생겨 실패했다. 15세기에도 가끔 전국적인 삼부회가 소집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지방삼부회가 그 기능을 대신했다. 지방삼부회는 소집·관리가 쉬웠으며 지역의 관습을 유지하기에도 훨씬 더 유리했다.

삼부회는 대체로 15세기말이 되어 그 주요한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때도 여전히 제도되지는 못했다. 이미 왕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영구적 직접세(인두세)를 징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1500년 이후 평상시에는 삼부회가 없어도 별 상관이 없었으며,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는 한번도 삼부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그후 삼부회는 16세기말의 종교전쟁과 같은 위기가 있을 때만 소집되곤 했다.

루이 13세의 미성년기에 소집된 1614년 삼부회는 상충되는 이해관계 때문에 3계급이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다는 큰 약점을 드러내주었다. 제3신분은 귀족들이 몇몇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삼부회 대표직에 대해 돈을 받고 파는 행위를 폐지하자는 결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나서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마지막이 된 그다음 삼부회는 프랑스 혁명(1789)이 시작될 무렵 재정적 위기와 광범위한 소요사태, 약해진 왕권을 배경으로 소집되었다. 개혁을 위한 노력이 두 특권층에 의해 번복될 것을 우려한 제3신분 대표들은 혁명적 국민의회를 소집했다(1789. 6. 17). 이로써 전통적 사회 계급을 토대로 한 대표제는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