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루타티

살루타티

다른 표기 언어 Lino Coluccio di Piero Salutati
요약 테이블
출생 1331. 2. 16, 토스카나 스티냐노
사망 1406. 5. 4, 피렌체
국적 피렌체

요약 피렌체의 인문주의자·고관.

젊은시절에 볼로냐에서 법률을 공부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 포기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자, 마음에도 없이 공증인이 되는 수습과정을 밟았다. 볼로냐의 페폴리 가문이 몰락하자(1351) 고향 스티냐노로 돌아왔고, 나중에 로마 북쪽에 있는 토디(1367)와 루카(1371)를 거쳐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령 쿠리아의 자치단체 총리가 되었다.

1375년 그는 피렌체 '시뇨리에'(전제군주로서 백성을 다스리도록 선출된 영주들)의 총리가 되어 죽을 때까지 31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면서, 피렌체 시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의 복잡하고 시끄러운 정치에 참여했다. 그가 다른 나라에 보낸 라틴어 편지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그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폭군 밀라노 공작은 1,000명의 피렌체 기병이 몰려와도 살루타티의 편지 1장만큼의 큰 손실은 입히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로 정치·행정 문제가 살루타티의 생활을 지배했지만 그는 인문주의에도 열렬한 관심을 갖고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문학과 원문 비평에 대한 학술논문이나 개인적인 편지를 써서, 포조와 레오나르도 브루니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비잔틴 학자인 마누엘 크리솔로라스를 피렌체로 초대했는데, 1396년 크리솔로라스가 피렌체를 방문한 것은 그리스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되살렸다는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큰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살루타티는 꽤 나이가 들어서도 독학으로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사라진' 필사본을 모으는 수집가이자 장서가로, 그가 모은 방대한 고대 라틴 문헌과 중세 문헌의 일부는 피렌체의 산마르코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