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군6진

4군6진

다른 표기 언어 四郡六鎭

요약 4군은 압록강 상류인 여연, 자성, 무창, 우예, 6진은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이다.
1398년에(태조 7)에 정도전이 조선의 세력권을 경원까지 확장시킨 후 1434년에 김종서가 6진 설치를 시작하여 1449년에 완료하였다. 이로써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동북지역에서의 강역이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이 지역의 관리를 위해 하삼도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4군 6진이 설치 후에도 야인의 침입은 계속되어 군비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점차 4군철폐 논의가 제기되어 144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를 철폐하고 1459년에는 자성군을 폐지하였다. 폐4군은 1683년(숙종 9) 복설 논의 이후 무창·자성의 2진이 설치되었으나 곧 혁파되었다.

4군은 압록강 상류인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武昌)·우예(虞芮), 6진은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이다.

4군6진
4군6진

고려말에는 압록강 하류지역인 창성(昌城)·벽동(碧潼)·강계(江界)까지 진출하여 공민왕 때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를 두었고, 동북면 지역에는 1391년(공양왕 3)에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설치했다.

조선초에도 이 지역에 대한 관리를 계속하여 강계는 부(府)로, 갑산은 군으로 고치고, 1416년에는 갑산에서 여연을 분리시켜 강계에 소속시켰으며 군사체계도 강화하여 익군체제(翼軍體制)를 정비했다. 1421년(세종 3)에 최윤덕(崔潤德)이 서북면에 연대적인 방어체제를 마련할 수 있도록 소현(小縣)을 혁파하여 거진(巨鎭)을 설치하자는 건의를 했는데, 결국 동북면과 서북면의 모든 지역을 몇 개의 도, 즉 군익도에 분속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1424년에 평안도는 각 익에 소속하는 군현을 다시 조정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 익에 분속되지 않았던 지역까지도 망라하여 재편성했다. 이후에 4군은 강계도호부와 함께 5개 도 가운데 강계도(江界道)의 중익에 분속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진족의 침입이 잦고 특히 1432년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이만주(李滿住)의 침입이 있자 이를 계기로 1433년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아 황해도·평안도의 병사 1만 5,000여 명으로써 이를 정벌했다.

이것이 제1차 야인정벌(野人征伐)이었다.

이 원정 후 여연과 강계 사이에 성을 쌓아 자성군이라 하고 여연의 남촌, 강계의 북촌 일부를 떼어내어 붙이고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1437년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李蕆)이 수행한 2차 야인정벌 뒤 1440년에 여연군 동쪽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을 설치하여 1442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1443년에는 여연·자성의 중간지점인 우예보(虞芮堡)에 우예군을 설치하여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4군이 완성되었다. 1446년 갑산군 소속이던 산수보(山水堡)를 군으로 독립시켜 갑산과 무창을 잇는 중간거점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세종 때의 두만강·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영토 확정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양계지역에서의 군현제 운영은 적과 인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농업인구의 확보나 농토의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다. 농토를 따라서 흩어져 살다가 적침이 있으면 보로 피신하기도 했고, 거주지를 보로 옮기기도 했다.

북계진출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4군 6진이 설치되어 인구가 늘어난 뒤에도 야인의 침입은 계속되어 군비의 유지에 어려움이 많게 되자, 점차 4군철폐 논의가 활발해져 144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를 철폐하고 주민을 강계부와 구성부로 각각 옮겼다. 1459년에는 자성군마저 폐지하여 주민을 강계로 옮겼다. 이후 이 지역을 폐4군이라 불렀으며 주민의 거주가 금지되었는데, 한때는 폐4군으로 옮겨 살면 여러 가지 역 부담을 면제해 준다는 낭설이 퍼져 대규모의 인구가 이동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폐4군은 1683년(숙종 9) 복설논의 이후 무창·자성의 2진이 설치되었으나 곧 혁파되었다. 그뒤 1788년(정조 12)에 무창진이 복설되었다가 1813년(순조 13) 부(府)로 승격되어 부치를 후주보(厚州堡)로 옮기고 후주라 했다.

동북면 지역은 태조 이성계의 근거지로 서북면보다는 쉽게 확정되었다. 1398년(태조 7)에는 정도전이 이 지방의 군현경계를 정하여 조선의 세력권을 경원(慶源)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뒤 여진이 침입하여 1410년(태종 10)에는 경성(鏡城)으로 방어선을 후퇴시키기도 했다.

1432년(세종 14)부터 다시 적극적인 북방경략에 나서 석막(石幕)에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했다. 그후 1434년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고 6진의 설치에 착수하여 영북진을 옮겨 종성군을 설치하고 회령진과 경원부를 신설 또는 이치했으며(1434~35), 1437년에 경흥군, 1440년에는 온성군을 잇따라 설치하고 1449년에 석막에 부령부를 둠으로써 이 일을 일단락지었다. 이로써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동북지역에서의 강역이 확정되었다. 4군 6진의 개척은 압록강·두만강 유역을 우리의 국경선으로 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정부에서는 이 지역의 확고한 관리를 위해 하삼도민을 이주시키는 대규모 사민(徙民)을 시행했다.→ 사민, 야인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