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니

비니

다른 표기 언어 Alfred-Victor, comte de Vig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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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7. 3. 27, 프랑스 로슈
사망 1863. 9. 17,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극작가·소설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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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젊은시절과 낭만주의 작품
  3. 원숙기와 환멸
  4. 영향

개요

프랑스 낭만주의의 주요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바이런 경과 토머스 무어의 문체를 가진 시와 월터 스콧의 문체를 지닌 소설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젊은시절과 낭만주의 작품

비니는 프랑스 혁명으로 몰락한 귀족이자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60세로, 7년전쟁에 참전한 퇴역군인이었다. 외할아버지인 바로댕 후작은 해군에서 함대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비니는 파리에서 자랐고, 보나파르트 고등중학교에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교육을 받았지만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그는 '무기를 드는 영광에 대한 극단적인 사랑'을 느꼈는데, 이것은 그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공통된 열정이었다. 가문의 전통으로 인해 군주제도에 애착을 느낀 그는 1814년 부르봉 왕가가 권좌에 복귀하자 17세의 어린 나이로 왕의 근위대에 들어가 소위가 되었다.

1822년에 중위로 진급했고 이듬해에는 대위가 되었지만, 이 젊은 장교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대신 요새를 지키는 임무만 수행하는 데 싫증을 느꼈으며, 따분한 군인보다는 작가생활의 모험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는 여러 번 휴가를 얻은 뒤 1827년에 군인생활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동안 그는 군대의 염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문학에서 찾아냈고, 1820년에 첫번째 시 〈무도회 Le Bal〉를 발표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빅토르 위고의 문학지 〈뮈즈 프랑세즈 La Muse Fran이미지aise〉에 여러 편의 시를 기고하는 한편, 2년 뒤에는 첫번째 시집을 출판했다.

파리의 문학 살롱과 평론지들은 힘과 깊이뿐 아니라 우아함까지 겸비한 낭만주의적 시인의 탄생을 박수로 환영했다. 〈고금(古今) 시집 Poèmes antiques et modernes〉(1826)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비니는 시에만 뛰어난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시는 '철학적 사고'를 서사시적이거나 극적으로 '연출'하는 장르였다. 그는 국왕의 측근인 생 마르 후작이 리슐리외 추기경을 상대로 꾸미는 음모를 다룬 역사소설 〈생 마르 Cinq-Mars〉(1826)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다.

비니가 사실로부터 벗어났다면 그것은 인물과 명제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월터 스콧(당시 그의 소설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음)은 이 작품을 칭찬했지만, 평론가들의 비판 때문에 비니는 제4판(1829)의 서문에서 예술과 역사가 철학적 목적을 어떻게 촉진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야만 했다. 그는 나중에 이 명제를 포기했다. 그는 또한 셰익스피어에게 전형적인 낭만주의자다운 관심을 기울여, 〈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을 〈샤일록 Shylock〉(1829)으로 개작했을 뿐 아니라 〈오셀로 Othello〉도 〈베니스의 무어인 Le More de Venise〉(초연 1829)으로 개작했다.

이 젊은시절에 그는 이미 작가의 풍모를 갖추었고, 행복한 사람이기도 했다. 낭만파 시인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이 그의 재능을 인정했으며, 위고와 샤를 생트 뵈브는 그를 친구로 대했지만, 비니는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문학 단체인 '낭만파 동인'에 대해 다소 초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이 나라 예술의 여신'이라는 별칭을 가진 여성 작가 델핀 게(그녀에게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문학적 재능만이 아니라 미모 때문이기도 했음)와 인상적인 짝을 이루었지만, 올로롱에 주둔하고 있을 때 만난 부유한 영국인의 딸인 리디아 번베리와 1825년 2월에 결혼한 뒤, 델핀과는 관계를 끊었다.

원숙기와 환멸

1830년에 이르러 그의 성격은 좀더 우울해져 있었다.

7월혁명은 그에게 정치적 염세주의를 안겨주었고, 이런 염세주의는 왕정의 거듭된 실수로 더욱 강해졌다. 군주제도의 잘못은 〈생 마르〉에서 이미 분명하게 입증된 문제였다. 그는 샤토브리앙과 마찬가지로 체면 때문에 군주제도에 계속 충성을 바치려고 애쓰기는 했으나,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가 내세운 대의명분이 돈 많은 부르주아지의 힘으로 왕위에 올라앉은 루이 필리프의 대의명분만큼이나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신념을 가지려고 애썼지만 실패하자, 앙리 드 생 시몽의 사회주의 철학 및 라므네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그리스도교도들과 타협하게 되었다.

그는 그가 '엘레바시옹'이라고 부르던 새로운 장르의 시 〈파리 Paris〉(1831)에서 이미 자신의 환멸을 인정했다.

그는 이제 어린시절의 신앙에 더이상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음을 느꼈기 때문에,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자살에 관한 명상이 들어 있는 또다른 '엘레바시옹'(1832)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몽모랑시의 연인들〉과도 같은 심적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신은?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신에 대해 생각지 않았다." 그가 의심할 것은 이제 사랑 자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여배우 마리 도르발과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1831~38) 사랑이 주는 정신적 외상을 고통스럽게 체험했다. 그는 도르발을 위해 1835년에 쓴 희곡 〈채터턴 Chatterton〉에 키티 벨이라는 역할을 일부러 만들기까지 했으나, 결국 그녀가 자기를 속이고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와 지나치게 다정한 우정을 계속 나누었다고 비난했다.

비니는 다른 역사소설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시인의 고독을 가장 불길한 모습으로 표현한 3편의 이야기를 한데 묶은 〈스텔로 Stello〉(1832)를 내놓았다.

여기에서 루이 15세의 변덕은 니콜라 질베르에게 굶어죽으라는 판결을 내리며, 공화정의 폭군 로베스피에르의 광기는 앙드레 셰니에를 처형대로 보내고, 런던 시장 윌리엄 벡퍼드의 이기주의는 시인 토머스 채터턴을 자살로 몰고 간다. 모든 정권은 시인에게 '종신 추방'이라는 가혹한 고통을 준다.

그렇다면 이 불길한 불안은 무엇인가? 비니는 다른 모든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보다는 덜 심각했지만) 그 불안의 본질을 자문한다. 그는 스텔로를 누아르 박사(검은 박사)에게 보내어 일종의 정신분석적인 검사를 받게 한다. 의사는 스텔로의 말을 들은 뒤, '정치적 생활에서 시적인 생활을 분리'하고 '무장 중립' 상태에서 사회를 정면으로 관찰하라는 처방을 내린다. 〈스텔로〉에서 채터턴이 자살하는 장면만을 떼내어 3막극으로 각색한 것이 희곡 〈채터턴〉이다.

그는 채터턴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면서, 물질주의적이고 무자비한 사회에서 시인이 당하는 불행을 똑똑히 보라고 대중에게 요구했다. 비니가 극작가로서 이룩한 위업인 〈채터턴〉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훌륭한 낭만주의 희곡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앙크르 원수 부인 La Maréchale d'Ancre〉(초연 1831)보다도 훨씬 뛰어난 것으로, 비니의 우울한 천재성을 그의 종교희극 〈공연한 두려움 Quitte pour la peur〉(1833 초연)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채터턴〉과 〈스텔로〉의 가혹하고 고상한 염세주의는 〈군인의 굴종과 영광 Servitude et grandeur militaires〉(1835)에서 다시 분명하게 나타났다.

비니가 시에 대한 환멸에서 교훈을 얻었던 것처럼 군대에 대한 실망에서 교훈을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다시 3부작 형식을 선택하여,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군인의 위엄과 고통을 이야기했다. 그는 군인을 시인의 형제로 만들었으며, 적을 죽여야 하는 직업의 의무에 묶여 있고 그때문에 수동적인 복종을 강요당하는 '사회의 최하천민'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러한 '천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군인의 굴종을 선언하는 동시에 위대함을 드러내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비니는 이 작품의 주인공 르노 대위를 통해 회의주의적인 동시대인들이 그토록 필요로 하는 종교적 예언자와 순교자를 과감히 제시했다. 이렇듯 비니는 극작가와 소설가로서는 강한 활력을 표현했지만, 시인으로서는 기묘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비니는 마리 도르발과 완전히 결별하기 1년 전인 1837년에 시집 개정판을 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사랑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서정적인 재능을 잃어버리고, 그후로는 완전히 내면적인 생활을 보낸 것 같다.

생트 뵈브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상아탑'으로 은퇴해버린 것이다. 그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고, 파리의 공허한 흥분보다 멘지로의 샤랑트에 있는 영지의 고요함을 더 좋아했다.

1841년에 그는 소설가인 오노레 드 발자크 및 시인 라마르틴과 함께 문학저작권을 옹호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1841년 1월 15일 〈르뷔 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에 발표한 논설은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사실상 법안을 기초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3월 29일에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그 직후, 비니는 문필가의 옹호자 역할을 더욱 강력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5차례의 좌절을 맛본 뒤 1845년 5월 8일에야 겨우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몰레 백작은 불성실한 연설로 그를 맞아들였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은 분명 그의 천성에 맞지 않았다. 제2공화정 때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자리(이 자리는 아마 그의 교양과 취향에 적합했을 것임)도 얻지 못하고 샤랑트를 대표하는 의원 자리조차 얻지 못하자, 그는 이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비니는 나폴레옹 3세가 런던에 망명해 있을 때(1839) 그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나폴레옹 3세는 그의 접근을 무시했다. 비니는 〈스텔로〉에서 이미 시인의 지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이런 거듭된 실패는 그 견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멘지로의 이 은둔자는 스스로 감옥으로 비유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사랑에서 위안을 얻었다. 60세의 나이에 그는 죽어가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그 자신도 암의 발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런 슬픔 속에서 그는 젊은 여교사인 오귀스타 부바르의 다정한 보살핌에 의지할 수가 있었다.

그는 리디아가 죽은 지 1년이 채 못 되어 세상을 떠났고, 리디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 10월 28일에 부바르는 그의 아들을 낳았는데, 비니가 3월 10일에 쓴 〈순수 정신 L'Esprit pur〉의 마지막 절은 이 아들에게 바친 것 같다. "너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어린 자손이여!/너의 눈길 속에서 내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다./이 거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있다."

영향

비니는 놀랄 만큼 흥미로운 미발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사후에 출판된 〈운명 Les Destinées〉(1864)·〈시인의 일기 Le Journal d'un poète〉(1867)·〈다프네 Daphné〉(1912)·〈미발표 회고록 Mé moires iné dits〉(1958) 등은 그가 1837년부터 빠져들기 시작한 수수께끼 같은 침묵을 어느 정도 열어 보여준다.

그의 생전에 이 오랜 침묵을 간간히 깨뜨린 것은 〈르뷔 데 되 몽드〉지에 발표된 6편의 시, 즉 〈미개인 La Sauvage〉·〈늑대의 죽음 La Mort du loup〉·〈플루트 La Flûte〉(1843)·〈감람 동산 Le Mont des Oliviers〉·〈목동의 집 La Maison de Berger〉(1844)·〈바다에 던져진 병 La Bouteille laàmer〉(1854)뿐이었다. 그의 종교사상이 고통스러운 회의주의에서 명예와 연민 같은 인간적 가치를 옹호하는 쪽으로 발전한 과정은, 1837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그가 입 밖으로 낸 마지막 기도로부터 〈순수정신〉(1863), 즉 본질적으로 인간이면서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성스러운 정신의 지배가 임박했다는 예언에 이르기까지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미발표 시들(〈운명〉·〈신탁 Les Oracles〉·〈삼손의 노여움 La Colère de Samson〉·〈완다 Wanda〉·〈순수정신〉)은 1843~54년에 이미 발표된 시들과 한데 묶여 시집 〈운명〉으로 사후 출판되었으며, 거기에서 그의 사상은 더욱 풍부한 내용과 분명한 동향을 드러낸다.

알프레드 드 비니는 살아 있을 때는 라마르틴이나 위고처럼 인정받지도 영광을 누리지도 못했지만, 후세에게 헛되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후의 모든 세대에서 그의 추종자들(그들 중에는 샤를 보들레르와 앙리 드 레니에, 샤를 페기, 앙드레 브르통, 쥘 루아도 포함되어 있음)은 그를 존경했고, 그의 메시지를 철저히 연구했다.

〈순수정신〉을 비롯한 예언적인 시를 유산으로 남긴 비니는 그가 죽은 뒤 1세기가 넘도록 서방세계를 괴롭혀온 형이상학적 반란을 처음으로 예고한 선구자들 중 하나였음을, 이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