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제

브레제

다른 표기 언어 Pierre II de Brézé
요약 테이블
출생 1410(?)
사망 1465. 7. 16, 프랑스 몽레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군인·정치가.
Br대체이미지z대체이미지는 Bresz대체이미지라고도 씀.

샤를 7세의 신임을 받았다.

백년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433년 시칠리아 여왕 욜란데, 리슈몽 등과 함께 샤를 7세의 장관인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의 권력을 빼앗음으로써 유명해졌다. 또한 프라게리(1440년 샤를 7세에 대한 귀족들의 반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그는 왕세자 루이와 반란자들에 맞서 왕의 편에 섰으나, 루이가 즉위(루이 11세)한 후 곤경에 빠졌다. 1437년 앙주의 세네샬(관리인)이 되었고, 1441년에는 푸아투의 세네샬이 되었으며, 1440~41년 노르망디에서, 1442년에는 기옌에서 잉글랜드군과 싸웠다. 그후 샤를 7세의 시종이 되어 아녜스 소렐의 영향력을 업고 프랑스의 주요권력자가 되었다. 그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1444~50)은 바로 샤를 7세의 통치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왕세자 루이는 1448년 그를 기소해 재판을 받게 했지만 무죄판결을 받고 복귀했다. 그는 노르망디 재정복(1449~51) 때 큰 역할을 했으며, 특히 포르미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1451년 포르미니의 세네샬이 되었다. 1457년 샌드위치에서 잉글랜드 해안을 기습했으나 실패했고,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위해 원정을 준비하던 중 루이 11세가 즉위하자 궁지에 몰려 잠시 투옥되었다.

1462년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마르그리트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갔으나 1463년 그녀의 계획이 좌절되자 그녀와 함께 플랑드르로 돌아왔다. 그후 다시 노르망디의 세네샬로 임명되었다가 몽레리 전투에서 죽었다. 그의 세네샬 직책은 큰아들인 몰레브리에 백작 자크 드 브레제(1440경~90)를 거쳐 그의 손자이며 디안 드 푸아티에의 남편인 루이 드 브레제(1531 죽음)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