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

빌리 브란트

다른 표기 언어 Willy Brandt
요약 테이블
출생 1913. 12. 18, 독일 뤼베크
사망 1992. 10. 8,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운켈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정치가. 1990년 독일 통일과 공산국가들 및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큰 기여를 했다. 젊은 시절 반나치 운동을 벌였으며 게슈타포의 체포를 피해 망명했다. 사회민주당 집행위원회의 베를린 대표로 지냈고 서베를린 시장이 되었다. 1964년 사회민주당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6년 외무장관 겸 부총리가 되었다. 독소조약과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며 유럽 경제공동체 확대에 노력했다. 1974년 5월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동서 독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생애
  3. 정치 활동
  4. 유럽 경제공동체 확대
  5. 수상 및 저서

개요

독일 총리를 지낸 정치인.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이다. 1964~87년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SPD)의 총재, 1969~74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총리로 활약했다.

초기 생애

빌리 브란트는 1932년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1년 후 나치가 집권하자 사회민주당의 청년당원으로서의 활동으로 인해 게슈타포의 표적이 되자 체포를 면하기 위해 외국으로 피신했다. 이때 사용하게 된 이름이 빌리 브란트였다. 브란트는 노르웨이로 가서 저널리스트로서 생계를 꾸렸다.

정치 활동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스웨덴으로 피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전후 브란트는 노르웨이의 시민자격으로 독일에 돌아와 한동안 베를린 소재 노르웨이 공관에서 홍보담당관으로 지냈다. 정계 복귀를 위해 브란트는 독일 시민권을 재취득했으며, 한동안 사회민주당(SPD) 집행위원회의 베를린 대표로 지내다가 1949년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8년 후 서베를린 시장(1957~66)이 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빌리 브란트는 소련이 서베를린의 지위를 비무장 자유시로 하자고 요구했을 때(1958)와 특히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구축될 때 위대한 도덕적 용기를 발휘했다. 1964년에는 에리히 올렌하우어의 뒤를 이어 SPD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1, 1965, 1969년 3차례에 걸쳐 총리직에 도전했다.

1966년 기독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대연립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빌리 브란트는 외무장관 겸 부총리가 되었다. 빌리 브란트의 당은 1969년의 연방선거에서 의석을 늘이는 데 성공하여 군소정당인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기독민주당을 처음 야당의 위치로 밀어냈다.

브란트의 정부가 내린 최초의 중대결정은 독일 마르크화의 재평가였으며, 2번째의 중대결정은 핵확산금지조약에의 서명이었다. 총리로 선출된 이듬해에 브란트는 외교문제에 전념했으며 특히 오스트폴리티크(동방정책)로 알려진 정책을 공식화하여 동독, 동유럽의 기타 공산국가들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했다.

빌리 브란트의 노력의 결과 1970년 8월 소련과 상호무력 포기 및 유럽의 현행 국경선의 인정을 골자로 하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의 서부 국경선으로 인정하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이, 그리고 1971년 9월에는 베를린의 지위에 관한 4대국 협정이 체결되었다.

브란트가 폴란드와 체결한 조약은 논란을 야기하여 비방자들은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점령된 독일 영토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지지자들은 독일을 재통일하고 동유럽과의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는 길을 텄다고 찬사를 보냈다. 한편 1970년 겨울, 폴란드를 방문하여 유대인 게토지구에 세워진 추모비에 용서를 구했다.

유럽 경제공동체 확대

유럽 통합의 확고부동한 지지자인 빌리 브란트는 프랑스의 반대를 꺾고 유럽 경제공동체(EEC)를 확대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했다. 브란트는 영국과 그밖의 나라들을 EEC에 가입시키는 일에 다른 어떤 나라의 지도자보다도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브란트의 정부 내의 간첩사건으로 1974년 5월에 총리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임 후 브란트는 국제개발문제에 관한 독립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는데, 브란트 위원회로 알려진 이 위원회는 특히 개발도상국들에 관한 세계경제정책들을 연구하는 권위 있는 독립기관이었다. 빌리 브란트는 1990년의 독일 통일에도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독일과 유사한 형태로 국가가 분단이 된 한반도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수상 및 저서

빌리 브란트는 1971년에 동서의 화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 공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1984년 뉴욕에서 제3세계상, 198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평화상을 수상했다.

브란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빌리 브란트의 망명생활 : 1933~47년의 수필, 회고와 서신 Willy Brandt in Exile : Essays, Reflections and Letters, 1933~1947〉(1971, R. W. 래스트가 영역)·〈1960~75년의 국민과 정치 People and Politics : The Years 1960~1975〉(1978, J. M. 브라운존이 영역)이다. 후자에는 빌리 브란트의 정치 회고록이 포함되어 있다.

빌리 브란트의 고향인 뤼베크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