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트

브라이언트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Cullen Bry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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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4. 11. 3, 미국 매사추세츠 커밍턴
사망 1878. 6. 12, 뉴욕 시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자연시인·편집자.

시 〈죽음에 대한 고찰 Thanatopsis〉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50년 동안이나 뉴욕 〈이브닝 포스트 Evening Post〉지의 편집자로 일했다.

초기 청교도 이주민의 후손으로, 16세에 윌리엄스대학 2학년에 입학했다. 경제적인 사정이 어렵고 예일대학교에 다니고 싶은 생각 때문에 윌리엄스대학을 중퇴했다. 그러나 예일대학교의 입학이 이루어지지 않자 위딩턴과 브리지워터에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법률을 공부해 21세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뒤 플레인필드와 그레이트배링턴에서 10년 가까이 변호사로 일했으나, 이 직업을 평생 동안 혐오했다.

26세에 프랜시스 페어차일드와 결혼, 그녀가 죽기까지 약 50년 동안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1825년 뉴욕 시로 이주해 〈뉴욕 리뷰 New York Review〉지의 공동편집자가 되었다. 1827년에는 〈이브닝 포스트〉지의 편집자가 되었고, 1829년 편집장 겸 공동소유주가 되어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버는 돈을 신중히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으며,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어린시절 그에게 주입된 종교적 보수주의는 종교적 광시(狂詩)로 표현되었다. 13세 때에는 아버지의 정치적 보수주의에 자극받아 제퍼슨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 〈금지령 The Embargo〉(1808)을 썼다. 그러나 1817년 〈노스아메리칸 리뷰 North American Review〉지에 발표되어 그를 유명하게 만든 17세 때의 작품 〈죽음에 대한 고찰〉에서는 청교도의 교리를 버리고 이신론을 받아들였으며 그뒤로는 유니테리언파교도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입장을 바꿔 연방주의를 버리고 민주당에 입당, 〈포스트 Post〉지를 자유무역과 노동자의 권리, 언론의 자유, 노예제도의 폐지를 옹호하는 기관지로 만들었다. 한동안 자유토지당원(Free-Soiler)이었으며 그뒤에는 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27세 때 〈시집 Poems〉(1821)으로 문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말년에는 번역에 상당한 시간을 바쳤다. 브라이언트는 〈죽음에 대한 고찰〉·〈물새에게 To a Waterfowl〉 등의 시에서 고향 버크셔의 언덕과 시내를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