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브라운

다른 표기 언어 John Brown
요약 테이블
출생 1800. 5. 9, 미국 코네티컷 토링턴
사망 1859. 12. 2, 버지니아 찰스타운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호전적인 노예제 폐지론자.

1859년 버지니아 주 하퍼스페리에 있는 연방 무기고를 습격하다가 죽음으로써 노예제 폐지운동의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이 사건은 이후 남북전쟁(1861~65)으로 귀결되는 남북간의 지역적인 적대감을 고조시키는 작용을 했다.

브라운은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매사추세츠·뉴욕 등지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무두장이·양몰이꾼·양모장수·농부·토지투기업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지만, 많은 식구를 먹여살리기는 어려웠다.

그는 백인이면서도 1849년에 가족과 함께 뉴욕의 노스엘바에 있던 한 흑인공동체에 정착했는데, 그곳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뉴욕의 자선사업가인 게릿 스미스로부터 땅을 기증받아 건설한 마을이었다. 오랫동안 노예제를 증오해왔던 그는 흑인노예들이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공개적인 활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855년 그는 5명의 아들과 함께 캔자스 준주로 가서, 그곳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노예제 반대세력을 도와주었다. 그는 총과 탄약을 실은 짐마차를 끌고 오사와토미에 정착했으며, 곧 그 지역에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유격대의 대장이 되었다.

브라운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폭도들이 일으킨 로렌스 시 약탈사건(1856. 5. 21)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후 결국 복수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자신에게 이 신성한 사명이 부여되었다고 생각했다. 3일 후 밤에 그는 포타와토미크리크에 있는 노예제 지지자들의 거주지를 습격했으며, 이때 남자 5명을 집밖으로 끌어내 난도질해 죽였다(→ 포타와토미 학살). 그뒤로 이 지역의 노예제 옹호자들에게 '오사와토미의 늙은 브라운'이라는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858년 봄 그는 온타리오 주 채텀에서 흑인과 백인이 같이 참여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메릴랜드 주와 버지니아 주 산악지대에 도망노예를 위한 피난소를 세우겠다는 의견을 발표했다. 또 미국국민을 위한 임시헌법을 제안했으며 회의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어 브라운은 게릿 스미스와 보스턴의 몇몇 노예제 폐지론자들로부터 정신적·재정적 지원을 받아, 아직 수립되지도 않은 정부의 최고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1859년 여름, 브라운은 백인 16명과 흑인 5명으로 이루어진 무장집단을 이끌고 메릴랜드에 있는 한 농가를 빌려 본부로 삼았다. 이 농가는 포토맥 강을 사이에 두고 하퍼스페리에 있는 연방 무기고와 마주보고 있었다(→ 하퍼스페리 습격). 10월 16일 밤 그는 순식간에 무기고를 장악하고 그 지역의 지도급 인사 60여 명을 인질로 잡았다.

브라운은 도망노예들이 동료노예들을 해방시킬 '해방군'을 조직하여 반란에 동참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이런 결사적인 행동을 했다. 다음날 밤까지 지방 민병대와 싸우며 버텼지만 그 다음날 아침 기습작전을 감행한 해병대의 소규모 병력에 항복하고 말았다. 2명의 아들을 포함하여 그의 추종자 10여 명이 죽었고 자신은 부상을 당했으며, 결국 살인과 노예반란 선동, 국가에 대한 반역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브라운은 노예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도망운동을 촉발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재판에서 도덕적 어조로 일관된 변론을 하여 불후의 명성을 얻었으며 노예해방을 가져온 남북전쟁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