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Daniel Boone
요약 테이블
출생 1734. 11. 2(?), 미국 펜실베이니아 벅스
사망 1820. 9. 26(?), 미주리 세인트찰스
국적 미국

요약 미국 초기의 서부개척자, 전설적 영웅.

버지니아·테네시·켄터키 주가 만나는 지점 근처에 있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컴벌랜드 협곡을 지나는 통로를 개척했다.

그는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읽고 쓰는 법은 배웠다. 영국에서 이주해온 퀘이커교도인 가족들과 함께 젊은시절에 노스캐롤라이나 변경지역으로 이사했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떠돌이 사냥꾼으로 보냈다.

많은 백인들이 분 이전에 켄터키를 횡단했으므로 그가 횡단 길을 발견했다는 전설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1767년 가을, 사냥을 위해 처음으로 컴벌랜드 협곡을 지름길을 통해 지나갔으며, 1769~71년 몇몇 친구들과 함께 덫을 놓고 사냥을 하기 위해 켄터키로 되돌아갔다. 1773년 그의 가족과 다른 몇몇 가족들을 이끌고 켄터키로 향했으나 그들의 마지막 정착지 바로 너머에 있던 체로키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았다. 일행 중 분의 아들인 제임스를 포함한 2명이 고문당하다 살해되자 나머지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갔다.

1775년 3월 분과 28명의 동료들은 리처드 헨더슨의 트랜실베이니아회사에 고용되어 컴벌랜드 협곡의 통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회사는 켄터키를 영국의 14번째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인디언들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분 일행은 버지니아 동부에서 켄터키를 가로질러 그 너머에까지 이르는, '황야의 길'(Wilderness Road)을 개척했다. 이 길은 당시 서부로 알려진 지역으로 가는 주요통로가 되었으며, 이 통로가 개척됨으로써 켄터키에 분즈버러·해로즈타운·벤저민로건스와 같은 최초의 거주지역이 세워질 수 있게 되었다.

1775년 8월 분은 그의 부인 레베카와 딸들을 분즈버러에 이주시켰다. 그들은 이전에 인디언에게 생포되었던 몇몇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켄터키에 살게 된 최초의 백인 여성들이었으며, 그들의 도착은 그 지역 최초의 항구적인 거주지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켄터키를 14번째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켄터키는 버지니아의 군(郡)이 되었다. 분은 켄터키 군 민병대의 대장으로서 인디언의 공격으로부터 분즈버러를 지키는 책임자가 되었다.

1778년 그는 인디언에게 생포되어 쇼니족의 추장 블랙피시의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5개월 뒤 도망쳐서 인디언들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분즈버러의 거주자들에게 알렸다. 1778년 9월 영국군과 인디언들이 연합해 공격해왔을 때 거주민들은 10일 동안 포위되었으나 잘 견디어냈다. 분은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지도자였으나 돈을 모으지는 못했으며 광활한 토지를 소유했으나 많은 수익을 얻지는 못했다. 미국 독립전쟁 후 오하이오 강 유역의 측량사로 일했고 버니지아 주(지금의 웨스트버지니아) 카노어 군에서 몇 년 동안 살았다. 그뒤 1799년 그의 아들 다니엘 모건 분을 따라 루이지애나의 미주리로 이주해 그곳에서 사냥을 계속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미 전설적인 영웅이 되어 있었고, 1823년 바이런 경은 〈돈 주앙 Don Juan〉에서 그에게 바치는 7연시를 발표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