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아디수아프 4세 바사

부아디수아프 4세 바사

다른 표기 언어 Wladyslaw IV Vasa
요약 테이블
출생 1595. 6. 9, 폴란드 크라쿠프
사망 1648. 5. 20, 메레치
국적 폴란드

요약 폴란드의 왕(1632~48 재위).

부왕 지그문트 3세 바자는 폴란드에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무익한 대외 전쟁을 추진한 완고하고 편협한 신앙의 소유자였으나 그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해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북부 유럽과 러시아에서 변혁의 바람이 불던 시기에 폴란드의 안전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그가 15세 때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가 보리스 고두노프의 사망 후 '혼란시대'에 처해 있는 것을 틈타 모스크바를 점령한 뒤 어린 아들을 러시아의 차르로 앉히려고 선거공작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러시아의 차르로 선출되었으나 모스크바 공국을 차지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러시아 전역을 정복해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던 지그문트의 야심은 실패로 돌아갔다.

청년이 되면서 부아디수아프는 러시아(1617~18)와 오스만 제국(1621)에 대한 군사작전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1632년 아버지가 죽자 부아디수아프는 폴란드 왕위를 계승했다. 왕의 사망으로 폴란드가 불안정할 것이라고 예상한 러시아는 4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 폴란드 동부 국경을 넘어 진격해 스몰렌스크(1618년 러시아가 폴란드에 양도함)를 포위 공격했다.

부아디수아프는 1633년 3월 포위망을 깨뜨리고 공세를 취해 1634년 2월 러시아군 사령관을 사로잡았다. 그결과 체결된 폴랴노프 평화조약에서 러시아의 차르 미하일 로마노프는 과거 폴란드에게 양도했던 모든 영토들은 폴란드에 귀속된다는 것을 승인했으며, 부아디수아프가 로마노프 황제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20만 루블을 배상한다는 데 합의했다.

부아디수아프는 그후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투르크인들로 하여금 그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협정을 통해 폴란드와 오스만 투르크는 각각 카자크족과 타타르족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했고, 공동으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부아디수아프는 30년전쟁의 와중에 있던 스웨덴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1635년 9월 유리한 조건으로 슈툼스도르프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아버지가 잃어버린 스웨덴의 왕위를 되찾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왕의 권력과 야심에 제한을 가하려는 폴란드 의회의 견제 때문에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1637년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누이인 오스트리아의 체칠리아 레나타와 결혼했다. 1640년에 레나타가 아들 지그문트 카지미에슈를 낳았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권력 강화를 시도했다. 전쟁중에 있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에서 중재 노력을 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침내는 카자크인들을 이용해 투르크가 폴란드를 공격하도록 만들 계획을 꾸몄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군사적 지도력이 필요하리라고 본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실패했다.

1647년 아들의 죽음에 상심하던 차에, 카자크인들이 그가 한 약속이 구체적인 성과 없이 빈말로 끝나버린 것에 분노해 폴란드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그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