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보천교

다른 표기 언어 普天敎

요약 일제강점기에 창시된 한국의 신종교. 증산교에서 유래한 종교로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이 사망한 후 차경석이 교권을 장악하고 1921년 창시했다. 한 때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으나 1936년 차경석이 사망하자 일제의 유사종교해산령에 따라 해체되었다. 해방 후 교단이 다시 조직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리는 인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신앙의 대상은 삼광영으로서 일·월·성을 받든다.

증산교에서 유래한 신종교. 고창 출신의 동학 접주였으며 증산교도였던 차경석이 창시했다. 차경석은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을 만난 뒤 열렬한 증산교도가 되었고, 이종사촌누이인 고판례(高判禮)를 강일순에게 소개하여 부인이 되도록 했다. 1909년 강일순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사망한 후, 1911년 이들은 강일순의 영에 감응했다는 고판례를 교주로 선도교를 창립했는데, 선도교 창립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차경석은 교세가 늘어나자, 교권을 장악했다. 이 때를 보천교에서는 보천교의 창립 시기로 보고 있다. 주도권을 잃은 고판례는 교단을 떠나 따로 종단을 설립했다.

차경석은 자신이 동방의 맹주가 될 것이며, 조선은 세계통일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1920년에 교단조직을 60방주로 재편하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했다. 1921년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황석산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렸다. 이 천제는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행해졌으며,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을 보화(普化, 뒤에 보천교라고 변경)라고 제정했다. 이 천제를 기화로 하여 차경석은 천자(天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팽배해졌고, 차천자로 불렸다. 1922년 〈보광(普光)〉을 발행했다, 이 무렵 서울 종로에 세운 포교당에 '보천교'라는 명칭을 달았는데, 이때부터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최남선이 경영하던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경영했다. 그후 일제의 종교탄압이 강화되자 차경석은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하여 표면적으로는 조선총독부에 친일사절단을 파견했으며, 또 시국대동단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는 등 친일활동을 했다. 그러나 교단 내에서 그의 친일활동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탈퇴하여 각기 새로운 교단을 세우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태을교·동화교·수산교·삼성교·무을교·인천교·원군교 등이다. 한편 이 시기에 은밀히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도 기여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1936년 차경석이 죽고 일제의 '유사종교해산령'으로 인해 보천교는 해체되었다. 8·15해방 후 다시 교단이 조직되었지만 과거의 교세를 회복하지 못했고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었다. 보천교의 교리는 인의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인의를 실천하는 것이 인도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한다. 신앙의 대상은 삼광영으로서 일(日)·월(月)·성(星)을 받든다. 의례는 사절후치성과 5회의 정례치성을 드린다.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전은 〈대순전경(大巡典經)〉을 비롯하여 〈대도지남(大道指南)〉·〈교조약사 (敎祖略史)〉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