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보일

로버트 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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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27. 1. 25, 아일랜드 워터퍼드 리즈모어
사망 1691. 12. 30, 런던
국적 아일랜드

요약 기체의 특성들에 관해 선구적인 실험들을 행한 것과 현대 화학원소이론의 앞선 형태였던 입자적 물질관을 신봉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했다. 런던 왕립학회의 창립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1645~55년에 도싯(Dorset)에서 살 때 실험연구를 시작했고 도덕에 관한 에세이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중 몇 개는 1655년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예비 성찰들>로 출판되었다. 1656~68년 로버트 훅의 도움으로 공기의 물리적 특성들과 공기가 연소, 호흡, 소리의 전달에 필수적임을 보여주는 선구적인 실험들을 행했다. 이 연구과정에서 보일의 법칙을 발견했다. 1661년 출간한 <회의적 화학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이론과 파라켈수스가 제안한 3원리를 공격했다. 로버트 보일은 왕립학회와 자선사업에도 계속 관심을 가졌다. “악명 높은 이교도들에 대항해 그리스도교를 증거하기 위한” 보일 강연과 설교 시리즈에 기금을 기부했다.

보일(Robert Boyle)
보일(Robert Boyle)

로버트 보일은 기체의 특성들에 관해 선구적인 실험들을 행한 것과 현대 화학원소이론의 앞선 형태였던 입자적 물질관을 신봉한 것으로 유명하다.

런던 왕립학회의 창립회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로버트 보일은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집안의 14번째 아들이었다. 1635년 이튼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그후 1639~44년 사이에 유럽 대륙, 주로 스위스에서 가정교사와 공부했다.

1645~55년의 얼마 동안 도싯(Dorset)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실험연구를 시작했고 도덕에 관한 에세이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중 몇 개는 1655년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예비 성찰들 Occasional Reflections upon Several Subjects〉로 출판되었다. 이 에세이 중 하나는 조너선 스위프트로 하여금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를 쓰도록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로버트 보일의 영지와 관련하여 아일랜드에서 얼마간 살았다. 그곳에서는 실험기구들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해부학적 절개에 몰두했다.

1656~68년 옥스퍼드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다행스럽게도 유능한 발명가이자 왕립학회의 다음 번 실험책임자가 될 로버트 의 도움을 받았다. 훅은 로버트 보일을 도와 공기 펌프를 만들었다. 이 기구의 과학적 가능성을 금방 깨달은 보일은 공기의 물리적 특성들과 공기가 연소, 호흡, 소리의 전달에 필수적임을 보여주는 선구적인 실험들을 행했다.

로버트 보일은 이 연구들을 1660년 〈공기의 탄력에 대한 자극과 그 효과에 관한 새로운 물리역학적 실험들 New Experiments Physio-Mechanicall, Touching the Spring of the Air and its Effects〉로 펴냈다. 1662년의 재판에는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현재 보일의 법칙이라고 알려진 관계에 대해 왕립학회에 제출한 1661년의 보고서를 부록으로 포함시켰다(보일의 법칙). 1661년 〈회의적 화학자 The Sceptical Chymist〉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이론(흙·공기·불·물)과 파라켈수스가 제안한 3원리(소금·황·수은)를 공격했다.

대신 그것들을 융합하여 입자를 만들어내는 근본입자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 개념에 따르면, 물질들이 서로 다른 것은 근본입자의 수·위치·운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현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들과 성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근본입자들의 운동과 조직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로버트 보일은 서로 다른 종류의 근본입자들(19세기 관점)을 가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생각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유효하다. 실험을 통해 금속의 하소를 연구했고, 산(酸)과 알칼리 물질을 구별하는 방법도 제안했는데 이 방법은 화학적 지시약 사용의 기원이었다. 보일은 또한 무역과 제조공정에도 관심이 있었다.

1668년초부터 로버트 보일의 여동생 캐서린(라넬라 부인)과 함께 런던에 거주했다.

로버트 보일의 생의 말기였던 이 시기에도 실험실 조수들의 도움을 얻어 실험연구를 계속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20세기초까지 독립적으로 존속했던 화학물질제조회사를 세웠다. 보일은 왕립학회와 자선사업에도 계속 관심을 가졌다. 보일의 유언에 따라 "악명 높은 이교도들에 대항해 그리스도교를 증거하기 위한" 보일 강연과 설교 시리즈에 기금을 기부했는데 이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로버트 보일은 일생 동안 큰 명성을 얻었고 유명한 외국인들이 언제나 그를 방문하고자 했다.

1680년 왕립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나 그 영예를 거절했다. 독실한 프로테스탄트교도로서 그리스도교를 해외에서 보급시키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신약성서〉를 아일랜드어와 터키어로 번역하여 출판할 돈을 냈다. 1690년 〈그리스도교의 거장 The Christian Virtuoso〉에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전개시켰는데, 로버트 보일은 자연에 대한 연구가 주요한 종교적 의무임을 보이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로버트 보일이 주장한 신의 섭리에 대한 견해에 따르면, 자연은 태초에 신에 의해 만들어져 운동하게 되었고 이제는 2차 법칙들에 따라 작동하는 시계와 같은 기계장치로서, 이는 과학에 의해 탐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형태가 없으며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운동하는 소체들보다 더 고귀했다.

보일의 공기 펌프
보일의 공기 펌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