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운데 테리

벨라운데 테리

다른 표기 언어 Fernando Belaúnde Terry
요약 테이블
출생 1912. 10. 7, 페루 리마
사망 2002. 6. 4, 리마
국적 페루

요약 페루의 정치가.

건축가이며 정치가였던 그는 1963~68년, 1980~85년 페루의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민주적 개혁과 친미정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페루의 대귀족가문에서 태어난 벨라운데는 1924~35년 미국과 프랑스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며, 1936년 페루로 돌아오기 전 잠시 멕시코에서 건축사 사무실을 개업했었다. 그는 페루의 저명한 건축가가 되었으며 〈페루의 건축 Arquitecto Peruano〉이라는 건축잡지를 창간했다.

그는 아버지 라파엘 벨라운데 디에스 칸세코가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하원의원(1945~48)을 지냈다. 1948년 군사 쿠데타로 정부가 전복되자 벨라운데는 국립공과대학교 건축대학 학장으로 복직했다. 그는 국민민주전선(Frente Democrático Nacional)의 창립을 도왔으며 1945~48년 리마에서 개최된 의회에 국민민주전선 소속 의원으로 참석했다. 1956년 자유선거가 복원되자 새로이 조직된 민주청년전선(Frente de Juventudes Democráticas)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후 곧 이 당은 '인민행동'(Acción Popular)으로 당 이름을 바꾸었다. 1963년 6월 선거에서 벨라운데는 40%라는 만족할 만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개혁주의적인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아마존 계곡에 정착민을 유치하기 위한 토지개혁 계획과 도로건설계획을 추진했으나 국내 정치문제에 있어서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야당의 반대로 많은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의 행정부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중남미 발전을 위한 진보동맹을 지지했다. 북부 페루에 위치한 원유생산지의 개발을 둘러싸고 미국 기업인 국제석유회사와 협정을 맺은 사실이 드러나 국민들의 원성을 샀고 마침내 벨라운데는 1968년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실각당했다. 그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70년 12월 페루로 돌아왔으나 1971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1976년 1월에야 페루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80년 5월 그가 실각당한 후 최초로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14명의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그가 페루에 언론의 자유를 회복시키긴 했지만 높은 인플레이션과 막대한 외채 그리고 테러집단인 '빛나는 길'의 무력공격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테러 집단과의 싸움에서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그의 무능력과 긴축정책으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1985년 5월 선거에서 참패당했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페루의 통치 La conquista del Perú por los Peruanos〉(1959)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