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수비오

베수비오

다른 표기 언어 Vesuvio
요약 테이블
위치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 나폴리 만 연안
대륙 유럽
국가 이탈리아
높이 1,281m

요약 이탈리아에 있는 화산. 해발 약 600m 지점에서 솜마 산으로 불리는 반원형의 산릉이 시작되어 북쪽에서 화구구를 둘러싸고 있다. 정상에 있는 큰 분화구는 1944년의 분화로 생긴 것이다. 베수비오는 홍적세 말기에 처음 생겼다. 79년에 대규모의 화산 폭발을 일으켜 폼페이와 스타비아이가 화산재와 화산력으로 뒤덮이고, 흘러내린 진흙에 헤르쿨라네움이 파묻혔다. 79~1631년에 화산이 몇 차례에 걸쳐 폭발했고, 그 이후에는 화산의 분출형태가 바뀌면서 화산활동이 계속되었다. 이 화산은 휴지기에는 화구가 막히는 반면, 분출기에는 화구가 계속 열려 있다. 분출기의 기간은 6개월~30년 9개월로 다양하며, 휴지기의 기간은 18개월~7년 6개월이다.

베수비오(Vesuvio)
베수비오(Vesuvio)

1980년에는 화구구(火口丘)의 높이가 1,281m였으나, 대규모로 분화할 때마다 높이가 많이 달라진다. 해발 약 600m 지점에서 솜마 산으로 불리는 반원형의 산릉이 시작되어 북쪽에서 화구구를 둘러싸고 있다. 솜마 산과 원추 화산 사이에는 지간테 계곡이 있다. 화구구의 정상에 있는 깊이 300m, 폭 600m 정도의 큰 분화구는 1944년의 분화로 생긴 것이다.

베수비오 주변지역과 이 산의 아래쪽 비탈에 2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한다. 나폴리 만 연안을 따라 공업도시들이 있으며, 산의 북사면에는 소규모의 농업 중심지들이 있다.

베수비오는 지금으로부터 20만 년이 조금 안 된 홍적세 말기에 처음 생겼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화산이지만 수세기 동안 활동을 하지 않다가 79년에 대규모의 화산 폭발을 일으켜 폼페이 시와 스타비아이 시가 화산재와 화산력(火山礫)으로 뒤덮이고, 흘러내린 진흙에 헤르쿨라네움 시가 파묻혔다. 나폴리 서쪽 지역에 있었던 작가 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2통의 편지에 그당시의 대참사가 잘 묘사되어 있다.

79~1631년에 화산이 몇 차례에 걸쳐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확인된 연도는 79, 203, 472, 512, 787, 968, 991, 999, 1007, 1036, 1631년이다. 특히 512년에 일어난 화산폭발은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가 베수비오 산록의 주민에게 납세의무를 면제해주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휴지상태에 있은 후, 점차 강도가 심해지는 지진이 6개월 동안 연속 일어나다가 1631년 12월 16일 엄청난 화산폭발이 일어났다. 이때 화산의 산록에 있던 마을들이 많이 파괴되었으며, 약 3,000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또한 용암이 바다까지 흘러내렸으며 재가 하늘을 며칠 동안 검게 뒤덮었다. 1631년 이후에는 화산의 분출형태가 바뀌면서 화산활동이 계속되었다.

이 화산은 휴지기와 분출기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휴지기에는 화구가 막히는 반면, 분출기에는 화구가 계속 열려 있다. 1660년과 1944년 사이에 이같은 주기가 약 19번 있었다. 분출기 막바지에 일어나는 아주 격렬한 화산 분출은 1660, 1682, 1694, 1698, 1707, 1737, 1760, 1767, 1779, 1794, 1822, 1834, 1839, 1850, 1855, 1861, 1868, 1872, 1906, 1944년에 일어났다. 분출기의 기간은 6개월~30년 9개월로 다양하며, 휴지기의 기간은 18개월~7년 6개월이다.

베수비오 화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18세기말이다. 1845년 해발 600m 지점에 관측소를 세웠으며, 20세기에는 여러 지점에 많은 관측소를 설치해 화산학적인 측정을 하고 있다.

베수비오의 사면에는 포도원과 과수원이 많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라크리마 크리스티'라는 상표로 알려져 있고, 특히 고대 폼페이에서는 포도주 단지에 베수비눔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온통 죽은 참나무와 밤나무로 덮여 있으며, 북쪽에는 솜마 산의 사면을 따라 정상까지 숲이 연결되어 있다. 서쪽 기슭에는 작은 숲들이 여기저기 나타나다가 해발 600m 지점에서부터 금작나무로 뒤덮인 기복이 심한 고원이 전개된다. 이곳에는 79년의 대폭발로 인해 생긴 분화구가 막혀 있다. 더 높이 올라가면 거대한 화구구의 사면과 솜마 산의 안쪽 사면의 지표는 거의 불모지로 되어 있는데, 휴지기에는 이곳이 초원성의 덤불로 뒤덮인다. 이곳의 토양은 매우 비옥하다. 1631년의 분출이 있기 전인 오랜 휴지기간 동안에 분화구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고, 방목된 가축들이 물을 먹던 호수도 3개 있었다. 사면의 식생(植生)은 분출기에는 화산 가스 때문에 모두 죽어버린다.

1906년의 화산폭발이 있은 뒤, 격렬한 화산폭발 후 항상 흘러내리는 진흙더미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산사면에 나무를 심었으며, 이 나무들은 토양이 비옥해 빨리 자랐다. BC 73년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불모의 솜마 산 정상에서 프라이토르(법무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포위당했을 때 이곳은 야생 포도넝쿨로 뒤덮인 험준한 바위들이 벽처럼 둘러선 넓고 평평한 함몰지였다. 스파르타쿠스는 포도넝쿨 가지를 꼬아 만든 밧줄로 경계가 소홀하던 분화구 가장자리의 틈새를 기어올라가 탈출에 성공했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그림들을 보면 이 산은 79년의 폭발 이전에는 봉우리가 하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