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버틀러

다른 표기 언어 Samuel Butler
요약 테이블
출생 1835. 12. 4, 잉글랜드 노팅엄셔 랜거 렉토리
사망 1902. 6. 18, 런던
국적 영국

요약 풍자소설 <에레혼>(1872)을 통해 19세기 영국 사회제도를 풍자했고, 자전적인 소설 <만인의 길>(1903)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아 다윈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그 뒤 종교와 진화의 문제는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처음에는 신이란 존재 없이도 살 수 있게 해준 다윈의 학설에 매료되었으나, 자신의 신을 찾게 된 이후에는 신을 배제한 다윈의 학설을 비판했다.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나마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것은 <에레혼>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그의 작품 가운데 약간의 돈을 벌게 해준 유일한 작품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걸리버 여행기>이후 상상의 나라 여행이라는 전형적 형식을 빌려 당대의 생활과 사상을 풍자한 문학 가운데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은 이듬해에 출판된 〈만인의 길〉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풍자소설 〈에레혼 Erewhon〉(1872)에서는 영원한 진보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환상이 깨질 것을 예견했다.

자전적인 소설 〈만인의 길 The Way of All Flesh〉(1903)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아버지는 토머스 버틀러 경이며, 슈루즈베리 학교 교장을 지내고 나중에 리치필드 주교가 된 새뮤얼 버틀러가 할아버지였다. 슈루즈베리에서 6년을 지낸 뒤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진학해 1858년 졸업했다. 아버지는 그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으며, 버틀러도 성직자로 임명받기 위한 준비로 런던의 한 교구에서 잠시 빈민가 생활을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독립심이 강하고 이단적인 성격 때문에 아버지가 옹호한 모든 것, 즉 가정, 교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음악 공부와 그림을 계속했으나,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인 뒤 케임브리지대학과 교회, 집을 떠나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마련해준 자금으로 캔터베리 개척지에 양을 치는 넓은 목장을 만들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직후 다윈의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1859)을 읽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다윈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으며, 1·2년 뒤에는 친구에게 자기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와 그리스도교의 인연은 결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그뒤 25년 동안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종교와 진화의 문제였다. 처음에는 신(좀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신)이란 존재 없이도 살 수 있게 해준 다윈의 학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다윈설). 그뒤 자신의 신을 찾게 되자 신을 배제한 다윈의 학설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교회와 다윈 학설 신봉자들 양쪽 모두와 대립한 채 외로운 국외자로,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성서에 나오는 추방자 '이스마엘'처럼 여생을 보냈다. 뉴질랜드의 〈프레스 Press〉지에 다윈 학설에 대한 논문을 몇 편 기고했는데, 그 가운데 〈기계 속의 다윈 Darwin Among the Machines〉(1863)·〈Lucubratio Ebria〉(1865)는 나중에 하나로 합쳐져서 〈에레혼〉에 실렸다.

이 2편의 논문은 기계문명과 생명의 관계라는 후기 사고의 중심문제를 가지고 그가 이미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기계 속의 다윈〉에서는 기계를 인간과 맞붙어 생존을 위한 싸움을 벌이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았고 그 결말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했다. 〈Lucubratio Ebria〉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기계란 몸 밖의 손·발 같은 것이어서 인간은 이것을 많이 지닐수록 더 진화된 유기체가 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뉴질랜드에서 재산이 2배로 늘자 1864년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의 클리퍼즈인에 아파트를 얻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1865년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에 대한 비판적 검토 Evidence for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Critically Examined〉를 익명으로 발표했다. 몇 년 동안 히설리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기려고 애썼다. 1876년까지 이따금 왕립 아카데미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유화 〈히설리 씨의 휴일 Mr. Heatherley's Holiday〉(1874)은 런던의 테이트 화랑에 소장되어 있으며, 랜거렉토리의 정신적 분위기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가족 기도 Family Prayers〉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소장되어 있다.

그뒤 작곡에도 손을 대 〈가보트, 미뉴에트, 푸가, 피아노를 위한 그밖의 소품 Gavottes, Minuets, Fugues and Other Short Pieces for the Piano〉(1885)을 발표했으며, 1888년에는 그가 최고의 작곡가로 꼽은 헨델의 작품양식을 본뜬 희극적 칸타타 〈나르시소스 Narcissus〉, 1904년에는 〈율리시스:오라토리오 Ulysses:An Oratorio〉를 발표했다.

그러한 작품에서 타고난 재능과 재치를 발휘한 것은 그다운 일이었다. 자신의 영역인 문학에서조차도 작품의 대부분은 기존의 질서라는 거인에게 조약돌을 던지려고 나서는 총명한 풋내기의 냄새를 풍긴다. 버틀러는 "나는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권력이 치료의 가망이 없을 정도로 썩어빠졌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아니면 그 어떤 주제도 작품에서 다루지 않았다"고 말했다. 때문에 정통 다윈 학설과 정통 그리스도교의 체제를 공격했으며, 그뒤에는 〈오디세이아의 여성작가 The Authoress of the Odyssey〉를 통해 〈오디세이아 Odyssey〉가 한 여성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씌어졌음을 입증하려 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새롭게 해석한 〈부분적으로 재배열하고 재고해본 셰익스피어 소네트 Shakespeare's Sonnets Reconsidered, and in Part Rearranged〉(1899)를 내놓았다.

버틀러가 살아 있는 동안 작가로서 조금이나마 명성을 얻은 것은 〈에레혼〉(1872)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약간의 돈을 벌게 해준 유일한 작품이었다. 이 책으로 벌어들인 돈은 69파운드 3실링 10페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이후 이러한 종류의 책, 즉 상상의 나라 여행이라는 유서깊은 전통적 형식을 빌려 당대의 생활과 사상을 풍자한 문학 가운데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뉴질랜드 레인지토토 산맥 고지대에 대한 기억이 바탕이 된 맨 앞의 몇 장(章)은 뛰어난 이야기체로 씌어져 있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맨 꼭대기에 있던 속 빈 석상들이 바람결에 이 세상 소리 같지 않은 화음을 냈다는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낯선 나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에레혼〉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자연 풍경은 이탈리아 북부를 이상화한 것이며, 그곳의 제도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이상적·풍자적으로 뒤집어놓은 것이다.

종교와 진화라는 2가지의 주된 주제는 각각 '음악은행'(교회), '어떤 에레혼 사람의 심판', '기계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다루어졌다. 에레혼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기계가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위험한 적수가 된다고 보아 없애버렸으며, 질병을 죄악으로 여겨 처벌함으로써 매우 아름답고 튼튼한 몸을 지닌 인종을 탄생시켰다.

〈아름다운 안식처 The Fair Haven〉(1873)는 그리스도교를 반어적으로 옹호한 작품으로, 정통적인 뜨거운 신앙을 가장한 채 그리스도교의 밑바탕을 이루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놓는다.

버틀러는 자신에게 모범을 보였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기만했다는 느낌을 평생 떨쳐버리지 못했다. 부모와 그들의 종교가 그를 속였으며, 여러 해 동안 그에게 돈과 우정을 받았으면서 그 어느 것도 돌려주지 않은 친구들이 또다시 그를 속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삶 자체와 이 세상이 속 빈 껍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랜거렉토리라는 세계로부터 그를 구원해준 다윈까지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기꾼임이 드러날 것인가? 이것은 〈삶과 습성 Life and Habit〉(1878)을 쓰는 동안 그에게 떠오른 의문이었으며, 이 의문 때문에 그뒤에 발표한 〈진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Evolution, Old and New〉(1879)·〈무의식적인 기억 Unconscious Memory〉(1880)·〈행운인가 교활함인가 Luck or Cunning〉(1887) 등 진화를 다룬 일련의 책이 악의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다윈은 자연도태가 이루어지는 개체변이를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진화를 결코 설명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버틀러의 생각이었다.

다윈이 단지 우연만을 본 곳에서 버틀러는 몸으로 느껴지는 필요에 부응하려는 생물체 쪽의 노력을 보았다. 버틀러는 생물체가 필요한 습성을(그것을 해낼 수 있는 기관도 함께) 획득하고 후손에게 그것을 무의식적인 기억으로써 물려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다윈이 행위의 동기를 배제시킨 세계에 목적론을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동기를 신의 소유로 돌리는 대신 생명의 힘으로써 생물체 자체 안에 자리잡게 했다.

많은 사람들은 버틀러가 죽은 이듬해인 1903년에 출판된 〈만인의 길〉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이 작품에는 확실히 버틀러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서전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소설은 그가 자기 집안의 숨막히는 도덕률에서 도망쳐나온다는 줄거리를 섬뜩할 정도로 재치있고 사실적으로, 감상이 끼어들 여지없이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어니스트 폰티펙스는 버틀러가 어렸을 때의 자아, 오버턴은 그의 성숙한 자아를 대표하며 테오발트와 크리스티나는 부모이다. 타운리와 앨리셔는 "건강하고 잘생겼으며 상식이 있고 견문도 넓은 동시에 돈도 넉넉히 갖고 있어야" 한다는 버틀러의 기준에 들어맞는, '신을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 책은 반(反)빅토리아의 물결이 일기 시작할 즈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G. B. 쇼는 버틀러를 가리켜 '19세기 후반부의 가장 뛰어난 영국 작가'라고 경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