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

백작

다른 표기 언어 count , 伯爵

요약 여성형은 countess. 영국에서는 earl이라고 함. 유럽의 귀족 칭호 가운데 하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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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의 백작
  2. 독일의 백작
  3. 이탈리아의 백작
  4. 스페인의 백작
  5. 영국의 백작
  6. 러시아와 폴란드의 백작
백작의 관
백작의 관

근대에는 후작이나 공작보다 한 등급 낮은 작위이다. 로마 시대의 '코메스'는 원래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가신이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지방사령관 겸 판사였다. 그후 백작은 봉건체제에 서서히 받아들여져 일부는 공작에게 종속되었지만, 플랑드르·툴루즈·바르셀로나 같은 일부 백작령은 공작령만큼 넓었다.
왕이 봉건제후들에 대한 권위를 다시금 주장한 것은 각 나라마다 시대가 달랐으나 중앙집권화한 근대적 유형의 국가 형성으로 이어졌고, 백작의 정치 권력 상실을 의미했다. 그러나 백작이 귀족 계급의 일원으로서 누리던 특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남성형 여성형
네덜란드어 graaf gravin
노르웨이어 greve grevinne
덴마크어 greve grevinde
독일어 Graf Gräin
라틴어 comes comitissa
러시아어 graf grafinya
루마니아어 conte contesǎ
세르보크로아티아어 grof grofica
스웨덴어 greve grevina
스페인어 conde condesa
이탈리아어 conte contessa
일본어 hakushaku hakushaku-fujin
체크어 hrabě hraběnka
포르투갈어 conde condêsa
폴란드어 hrabia hrabina
프랑스어 comte comtesse
헝가리어 gróf grófnö
count의 각국어별 표기

프랑스의 백작

프랑스 백작은 늦어도 900년까지는 공작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봉건화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 관직의 성격은 사라지고 작은 땅의 세습영주가 되는 경향을 보였다. 프랑스에서는 11세기에 이미 이런 경향이 나타났고 그와 더불어 백작이라는 칭호를 별 제한 없이 사용하는 관례가 생겨났다.

12세기에 이르러 중간 정도의 지위를 가진 영주라면 누구나 플랑드르와 툴루즈처럼 넓은 봉토를 가진 영주와 마찬가지로 백작을 자처할 수 있었고 왕국의 체계가 좀더 안정된 13세기에도 이 칭호는 상당한 중요성을 가질 수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13세기초부터 왕의 이름으로 재판권을 행사하는 대법관 제도가 발달했는데 이것은 백작의 입법권과 사법권 및 사적인 전쟁을 제한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어서 백작은 화폐주조권을 잃었다(16세기). 게다가 넓은 봉토는 차츰 프랑스 왕권 아래로 재통합된 뒤, 왕자령(왕국의 한 행정구역으로 다스려짐)으로만 하사되었기 때문에 백작은 다양한 특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프랑스 제1제정과 그뒤를 이은 군주정 및 제국시대에는 백작의 지위가 영토의 의미를 전혀 갖지 않았고 장자상속에 따라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세습작위가 되었다.

독일의 백작

독일에서 백작이라는 칭호는 10세기경부터 대부분 세습작위가 되었지만 독일 백작은 프랑스보다 더 오랫동안 관직의 성격을 유지했다.

12세기에 신성 로마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는 백작에게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치안유지권을 부여했는데, 이 권한은 1100년까지 공작에게 속해 있었다. 그후 백작령이라는 용어는 백작이 생사 여탈권을 갖고 있는 지역을 의미하게 되었다.

12세기초부터 독일 서부에서는 공식 지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단지 그들이 갖고 있는 성에서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백작이 많이 나타났다. 프리드리히 1세 시대에는 '보호관'(Vögte) 같은 상류층의 일부 자유인들이 백작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13, 14세기에는 공작한테서 봉토로 하사받은 새로운 백작령이 생겨났다.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는 일반백작과 제국백작을 차츰 구별하기 시작했다. 제국백작은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한 요소인 백작단(Grafenkollegium)의 일원이 되었다.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뒤 제국백작의 지위도 한 단계 낮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는 황제 한 사람만의 '직속' 신하였던 제국백작이 독일 여러 국가의 군주들에게 종속된 지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연방의회는 1829년 '각하'(Erlaucht)라는 특별존칭을 쓸 수 있는 제국백작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탈리아의 백작

이탈리아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가 쇠퇴하면서 도시에 바탕을 둔 백작령 제도가 생겨났다. 이들 백작은 아무도 공작에게 종속되지 않았던 듯 하다. 어쨌든 공작이라는 칭호는 적어도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드물었다. 자치도시가 성장하자 백작령은 그때까지 갖고 있던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과 이탈리아 반도의 군주들은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백작이라는 칭호를 특권의 표시로 자주 부여했다.

스페인의 백작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에서는 서고트족의 영향으로, 카탈루냐와 피레네 산맥 바로 남쪽에 있는 지방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영향으로 백작령이 발달했다. 바르셀로나 백작들은 카탈루냐 백작령을 통합해, 적어도 프랑스의 플랑드르나 툴루즈 백작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사실상의 군주가 되었다. 또한 카롤링거 왕조의 아라곤 백작령은 아라곤 왕국의 핵심이었다. 반면에 카스티야 왕국의 모태가 된 카스티야 백작령은 원래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의 변경 지방이었다.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의 백작들은 11세기말까지만 해도 왕이 임명한 지방 행정관으로서 관직의 성격을 유지했지만, 그후에는 여러 종류의 세습 영주권을 갖는 것이 오히려 지배적인 원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와 그 이후의 스페인 군주국에서는 백작이라는 칭호가 좀처럼 내려지지 않았다.

영국의 백작

영국의 백작(earl) 칭호는 덴마크어 '야를'(jarl)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데인족의 왕 크누드(1016~35년에 재위한 잉글랜드 왕) 치세에 처음 잉글랜드에 도입되었다. 따라서 영국의 백작은 영국 귀족의 칭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영국의 백작은 또한 에드워드 3세가 아들 에드워드 흑세자에게 콘월 공작 작위를 준 1337년까지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초기에 백작은 여러 주에 대해 행정권을 행사했지만 1066년에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백작의 활동 범위는 1개 주로 제한되었다. 그후 백작의 지위는 더이상 영토와 결부되지 않게 되었고 18세기부터는 작위를 받은 사람의 성(姓)에 백작이라는 칭호만 덧붙이는 관례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레스터 백작은 레스터를 영지로 삼고 있는 백작을 뜻하지만 템플이라는 성에 백작 칭호만 붙인 템플 백작도 있을 수 있다.

원래 백작위를 계승하는 규칙은 봉건적 법률에서는 봉토를 상속하는 규칙이었다. 따라서 백작의 지위는 여자한테도 넘어갈 수 있었고 그 여자 백작의 남편이 아내의 권리인 백작 칭호를 받기도 했다. 중세 후기부터는 남자 상속자에게만 물려줄 수 있도록 상속권을 제한한 백작의 작위가 수여되었다. 1963년의 귀족법에 따르면, 백작은 영국의 다른 귀족작위와 마찬가지로 작위를 물려받은 지 1년 이내에 그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백작의 지위가 정지된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백작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백작 칭호가 도입되었고 대개는 정부에서 일정한 지위에 오른 관리들에게 이 칭호가 주어졌다. 폴란드에는 원래 백작이 없었지만 18세기말 영토가 분할된 뒤 러시아인·오스트리아인·프로이센인 들이 백작 칭호를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