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다른 표기 언어 Walther von der Vogelweide
요약 테이블
출생 1170(?)
사망 1230(?)
국적 독일

요약 중세 독일의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

그의 시는 개인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영역에서도 균형있는 삶의 덕목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조화를 파괴하는 인물·행위·신앙 등에 대해서는 반대의사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결코 큰 인물을 존경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즉 자신의 이상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심지어 교황이라 할지라도 분노의 대상으로 공격을 가했다. 동료 시인들이 붙여준 헤르(hêr:영어의 'Sir'에 해당하는 고대 독일어)라는 칭호에서 기사신분임이 드러나지만 발터의 출생지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그의 시집을 통해 볼 때 수도원 학교에서 정식교육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빈 궁정에서 시작 기술을 배웠으나 레오폴트 6세가 빈 궁정에 후임자로 부임했을 때 발터는 그의 호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아마도 이것은 당시 빈 궁정에 머물고 있던 당대의 가장 세련된 초기 궁정시인(미네징거) 라인마르 폰 하게나우와의 라이벌 관계로 일어난 일인 듯하다. 그러나 1197년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죽은 후 왕권을 둘러싼 분쟁기간 동안 벨프가(家)에 대항해서 호엔슈타우펜가(家)의 명분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호엔슈타우펜가의 필리프 폰 슈바벤의 후원을 얻게 되었다.

한편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벨프가를 지원하고 나섰는데 이때부터 교황에 대한 반감이 그의 정치시에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필리프의 대우에 실망하게 된 발터는 그후 여러 명의 군주를 섬기다가 마침내 1212년 다시 정치싸움에 끼어들게 되었는데, 이때는 인노켄티우스 3세에 대항하여 벨프가의 황제 오토 4세를 지원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접을 받지 못한 데 다시 실망하게 되었고, 같은 해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를 주장하고 나섰을 때 기꺼이 새로운 군주에게 돌아섰다. 1215년에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약간의 봉토를 수여받았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가 갈망해왔던 안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14세기에 나온 2편의 기록에 의하면 이 봉토의 위치는 뷔르츠부르크 호 근처라고 하는데, 발터는 말년을 이곳에서 보낸 듯하다.

현존하는 200여 편의 시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정치·도덕·종교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사랑에 관한 시이다. 종교시에서 그는 인간은 순례를 하거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창조주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교했다. 도덕 교훈시를 통해서는 충성·성실·자비·자기수양과 같은 인간의 덕목을 칭송했다. 그러나 이 덕목들은 그 자신의 생애에서는 그리 뚜렷이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랑에 관한 시에서는 궁정연애의 상황을 신선하고 독창적인 기법으로 묘사했으며, 〈보리수 아래에서 Unter der Linden〉와 같은 유명한 시를 통해 전대미문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문체를 개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궁정사회의 가식적인 태도들은 하층민의 자연스런 애정 앞에서 무너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