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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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民主黨

요약 1991년 9월 신민·민주 양당이 통합하여 출범했다. 김대중·이기택이 공동대표최고위원을 맡았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이 되었다.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김대중 대표는 정계은퇴를 했으며, 이후 이기택 대표체제로 운영되었다. 1995년 9월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은 분당되었다. 제15대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고, 1997년 8월 이기택이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어 총재로 선출된 조순은 9월 임시 전당대회에서 제15대 대통령 선거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과 합당 및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이회창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이어 합당 전당대회를 갖고 통합신당인 한나라당에 편입됨으로써 소멸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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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당배경
  2. 창당과정
  3. 조직 및 활동
  4. 분당 및 소멸
이기택(李基澤)
이기택(李基澤)

창당배경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거대여당이 출범한 이후 야권과 재야에서는 지속적인 야권통합 논의가 이루어져왔으나 통합 이후 당직의 지분문제로 계속 회의가 결렬되어왔다.

3차에 걸친 통합회의 결렬 이후 야권통합은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1991년 6월 20일 실시된 시·도지방의회 선거는 야당의 참패로 끝났고, 이런 지방의회선거 결과는 신민·민주 양당으로 하여금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창당과정

1991년 9월 10일 김대중·이기택 두 총재는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화와 개혁을 지향하고 시대적 소명과 범민주세력의 통합야당을 요망하는 국민의 여망을 받들어 통합수권야당의 결성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 통합선언에 앞서 신민당측의 김원기·한광옥·신기하 의원과 민주당측의 이철·김정길 의원과 장기욱 전 의원 등 6명의 실무대표는 3차례의 실무접촉을 통해 통합원칙에 합의했다. 9월 11일 국회교섭단체 등록(신민당측 67석, 민주당측 7석 등 총 74석)을 마치고, 9월 16일 합당수임기구 합동회의를 열어 당헌 정강 및 기본정책을 확정하고 지도부 진용을 갖춘 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법적 등록을 마침으로써 출범했다.

민주당의 강령은 ① 참여민주주의와 도덕정치 구현, ② 국민기본권 침해 배격, ③ 민족의 자존과 국익의 최우선, ④ 정의로운 경제질서 확립 등을 통해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민주복지사회의 구현과 민족통일을 성취할 주체가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구체적인 정책은 ①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 ② 상호존중의 민족통일 추진, ③ 정의경제의 실현, ④ 중소기업 중심의 안정성장 추진, 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복지사회, ⑥ 주거생활 보장과 효율적 교통정책 등에 역점을 두고 있다.

조직 및 활동

1991년 9월 16일 합당수임기구 합동회의에서 구성된 조직은 집단지도체제로 김대중·이기택을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이우정·박영록·박영숙·허경만·조순형·김현규·이부영·목요상 등 8명을 최고위원으로 선임했다.

당무는 2명의 공동대표가 합의하여 처리하기로 했으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는 김대중을 대표로 등록했다. 이외 중앙당 당직은 신민계 6, 민주계 4의 비율로 배분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민주당은 통합 이후 새로운 면모를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부정책에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반대할 것은 반대한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여당에 대한 투쟁에 임했다. 추곡수매동의안, 제주도 개발특별법안, 바르게 살기 운동조직 육성법안, 종합유선방송법안, 청소년기본법안 등을 여당 단독으로 처리 했을 때는 국회의사당에서 농성하기도 했다.

1992년 3월 24일 통합 이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국에서 29.2%의 지지를 얻어 지역구 75석, 전국구 22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되었으며 통일국민당과 함께 거대여당의 견제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북도에서의 지지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고 의석도 얻지 못했다. 반면 광주를 포함한 전라남북도에서는 55% 이상의 높은 지지율과 함께 39석 가운데 37석을 얻었다. 한편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대표는 39.9%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41.4%의 득표율을 얻은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고, 12월 19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민주당은 각 계파간의 갈등을 안은 채 이기택 공동대표체제로 운영되었다. 1995년 9월 5일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은 출범 3년 10개월 만에 분당되었다. 분당 이후 민주당은 개혁신당과의 통합 등으로 당세를 다졌으나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지역구 9석, 전국구 6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이후 민주당은 각 계파간의 갈등을 안은 채 이기택 공동대표체제로 운영되었다.

분당 및 소멸

1995년 9월 5일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은 출범 3년 10개월 만에 분당되었다.

이후 민주당은 개혁신당과의 통합 등으로 당세를 다졌으나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지역구 9석, 전국구 6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이어 6월 4일 전당대회에서 이기택을 총재로 선출했으나 1년여 만인 1997년 8월 4일 이기택이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강창성 부총재를 총재권한대행으로 한 과도체제로 운영되었다. 8월 28일 전당대회에서 당시 서울 시장이던 조순을 총재로 선출하고, 9월 11일 임시 전당대회에서 조순 총재를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함으로써 당의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11월 13일, 대통령 선거를 1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당시 집권 여당이던 신한국당과 양당 합당 및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조순 총재가 통합신당의 총재직을 맡는 것을 조건으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에게 통합신당의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이에 따라 11월 21일 신한국당과 합당 전당대회를 갖고 통합신당인 한나라당에 편입됨으로써 결국 소멸되었다.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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