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다

반다

다른 표기 언어 H(astings) Kamuzu Banda
요약 테이블
출생 1902경, 영국 중앙 아프리카 보호령(지금의 말라위) 카숭구 근처
사망 1997. 11. 25,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국적 말라위

요약 말라위(옛날의 니아살란드)의 초대 대통령.

말라위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지도자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미국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 1927년에 의사자격을 취득했다. 그후 영국 런던에서 또 하나의 의학박사학위를 딴(1941) 뒤, 그곳에서 1953년까지 개업의로 일했다.

반다가 아프리카 정치에 처음 개입하게 된 것은 중앙 아프리카의 백인 정착민들이 1949년에 로디지아와 니아살란드의 연방결성을 요구했을 때였다. 반다를 비롯한 니아살란드 사람들은 이런 조치로 백인 지배력이 확대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결국 1953년에 로디지아-니아살란드 연방이 형성되었다. 1953~58년그는 가나에서 병원을 개업했지만, 조국으로 돌아오라는 니아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은 1956년부터 계속 심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1958년에 니아살란드로 돌아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회의 의장으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방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고, 식민정부는 아프리카인의 적개심과 소요가 늘어나는 책임의 일부를 그에게 돌렸다. 1959년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그는 감옥에 갇혔다. 1960년에 석방된 그는 몇 달 뒤 니아살란드의 아프리카인에게 식민지 의회의 다수의석을 주겠다는 영국의 헌법개정안을 수락했다. 그는 1961~63년에 천연자원 및 지방자치장관으로 일하다가 1963년에 총리가 되었다. 그해에 로디지아-니아살란드 연방은 마침내 해체되었다.

니아살란드가 독립한 직후인 1964년에 내각은 위기를 맞았다. 젊은 장관들 가운데 일부가 점점 심해지는 그의 권위주의에 분노하여 그가 내린 몇 가지 결정(포르투갈 식민지 인정 및 남아프리카와 화해하는 결정 등)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임당하거나 스스로 사임했다.

1965년에 이 전직 장관들 가운데 2명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지방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말라위는 1966년에 반다 대통령의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일당체제 아래에서 공화국이 되었다. 반다는 말라위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장악하여 1971년에 종신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정권과 교역 및 접촉이 늘어나자 검은 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의 평판은 나빠졌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사회적 견해를 갖고 있던 반다는 여성의 짧은 스커트와 바지 착용을 불법화하고 장발의 외국인 남성 여행자들의 입국과 텔레비전 방송을 금지했다. 1990년대 들어 그의 권력 남용에 분노하던 말라위 국민들은 1994년 투표를 통해 그를 하야시켰다. 그후 1983년 정적 4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