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빈

박중빈

다른 표기 언어 朴重彬 동의어 처화, 處化, 소태산, 少太山, 대종사, 大宗師, 진섭, 鎭燮, 희섭, 喜燮양현수, 梁賢秀
요약 테이블
출생 1891. 3. 27, 전남 영광
사망 1943. 6. 1
국적 한국

요약 26세 되던 해인 1916년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우주 인생의 근본진리를 깨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깨친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박중빈이 원불교를 창립한 이후 제자들은 그를 소태산 대종사라 불렀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은 1916년을 원불교의 창립 원년으로, 4월 28일을 대각 개교절이라 해 크게 기리고 있다. 소태산은 1918년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에 들어가 약 5년간에 걸쳐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구상하고 제정했다. 또한 그는 사회개혁가·농촌운동가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1943년 53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호는 소태산(少太山). 농부인 아버지 성삼(成三)과 어머니 유정천(劉定天)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鎭燮), 청년시절에는 처화(處化)라 불렀다. 원불교를 창립한 이후에는 제자들이 소태산 대종사(少太山大宗師)라 불렀다. 7세 때부터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치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 20년 가까운 구도생활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산신(山神)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했고 다시 도사(道士)를 만나려 고행을 계속했다. 산신이나 도사를 모두 만날 수 없게 되자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입정삼매(入定三昧)에 빠지기도 했다.

26세 되던 해인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에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드디어 우주와 인생의 근본진리를 확연히 깨치게 되었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소태산은 스승의 지도 없이 스스로 깨친 진리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했으며, 또한 진리를 깨친 기쁨을 "맑은 바람 솔솔 불어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니 우주의 삼라만상이 저절로 밝게 드러나도다"(淸風月上時 萬像自然明)라고 표현했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이 큰 깨달음을 얻은 1916년을 원불교의 창립 원년으로 하고 4월 28일을 대각 개교절이라 해 크게 기리고 있다.

대각 개교절
대각 개교절

진리를 깨친 지 몇 달 후 40여 명의 신자를 얻은 소태산은 이들 중에서 9명의 표준제자를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 저축조합운동·방언공사·혈인기도 등을 통해 교단 창립의 터전을 닦았다. 1918년에는 전라북도 부안 봉래산에 들어가 약 5년간에 걸쳐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구상하고 제정했다. 1924년 전라북도 이리에 총부를 건설해 '불법연구회'란 임시교명을 선포하고 교회사업을 시작했다.

이후로 소태산은 약 20년간에 걸쳐 이곳 총부에 주재하면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 표어와 "동정일여 영육쌍전"(動靜一如 靈肉雙全),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佛法是生活 生活是佛法) 등의 교리 표어를 내걸고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지향하는 새 종교운동을 전개했다.

소태산은 1926년 신정의례(新定儀禮)를 발표해 당시 민중들의 예법혁신을 단행했고, 1935년에는 〈조선불교혁신론〉을 발간해 생활불교운동을 전개했다.

소태산의 불교혁신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일원상(一圓相)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고, 사은(四恩)의 신앙과 삼학(三學)의 수행으로써 모든 종교의 진리를 융통·활용한다. ② 모든 경전과 교서(敎書)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쉬운 말과 글로 평이·간명하게 편찬한다.

③ 교당은 교도가 많은 곳에 설치하고 남녀 교역자를 두루 양성해 원활한 교화를 도모한다. ④ 모든 신자는 정당한 직업을 가져 자력생활을 하고 사회발전에 공헌하며, 영혼구제에만 치우치지 않고 정신생활과 육신생활을 조화있게 한다. ⑤ 모든 의식과 예법은 진리와 사실에 근거해 간편을 위주로 하고, 시대에 맞고 대중이 다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 ⑥ 법의 계통을 재가·출가의 차별이 없게 하고 법위의 높고 낮음에만 따르게 한다. ⑦ 출가 교역자에 대해 결혼을 법으로 제한하지 않고 각자의 뜻으로 결정하게 한다.

⑧ 교단의 운영에 재가와 출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참여한다.

소태산은 원불교의 창시자인 동시에 사회개혁가·농촌운동가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예법개혁을 통해 당시의 번잡한 유교예법을 과감하게 혁신했으며, 허례폐지·미신타파·근검저축·공동출역 등을 통해 농민계몽과 생활개선에 앞장섰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재능으로는 남다른 손재주 하나 없고 아는 것으로는 보통 학식도 충분하지 못하거늘, 나같이 재능 없고 학식 없는 사람을 그대들은 무엇을 보아 믿고 따르는가"라고 했다.

1941년에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는 전법게송(傳法偈頌)을 발표했다. 1943년 6월 1일 53세를 일기로 중앙총부에서 열반했다. 제자들은 소태산을 후천개벽의 주세불(主世佛)로 존숭하고 있으며, 흔히 그를 '평범한 성자'라 부른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이 열반한 6월 1일을 육일대재라 하여 기념한다. 1971년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은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 노루목에 그의 대각을 기리는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 새긴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