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다른 표기 언어 朴鍾哲拷問致死事件

요약 1987년 경찰에 의해 불법 연행된 박종철이 수사과정에서 고문으로 인해 죽은 사건.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으나, 1987년 5월 17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밝혀졌다. 사건의 은폐 조작에 가담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임하고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되면서 종결되었다.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시키며 이후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9혁명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 변동의 복잡한 성격을 보여준 사건으로서 이른바 '1987년 6월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은 박종철의 사망 경위가 은폐·조작되었음이 밝혀지고 고문 가담자가 드러나기까지의 1단계와 재차 행해진 축소·조작의 전모와 그 관련자들이 밝혀지기까지의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8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수배자인 박종운(朴鍾雲)의 소재를 알기 위한 참고인이라는 이유로 1987년 1월 14일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1월 15일 경찰은 조사받던 박종철이 자기압박에 의해 충격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박종철의 부검의였던 중앙대학교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의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알려지자,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의 사망원인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이며 고문에 가담한 사람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이라고 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의 정정발표에도 불구하고 고문 가담자인 두 수사관을 참여시키지 않은 채 사건현장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이유로 비공개 현장검증을 실시함으로써 연행시간과 결정적인 사망 경위, 고문 가담자의 수 등에 대한 의혹들이 그대로 남겨진 채 이 사건의 1단계가 마무리되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2단계 은폐·조작 경위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끈질긴 추적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의 일기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자신의 부검소견서가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요청으로 '외상 없음'으로 조작되었다는 황적준의 증언은 온 국민의 충격을 자아냈으며, 언론은 최초의 고문 가담자 2명에 대한 경찰간부들의 회유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밀려 고문치사의 은폐·조작에 관련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임하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등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박종철 군 고문은폐 무죄 규탄시위
박종철 군 고문은폐 무죄 규탄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