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츠만

바이츠만

다른 표기 언어 Chaim (Azriel) Weiz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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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4. 11. 27, 러시아령 폴란드 모톨
사망 1952. 11. 9, 이스라엘 레호보트
국적 이스라엘

요약 이스라엘 신국가의 초대 대통령(1949~52).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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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교육
  3. 정치입문
  4. 극단적인 시온주의자들과의 투쟁
  5. 이스라엘의 대통령

개요

수십 년 간 세계 시온주의자 조직을 배후에서 조종했다.

초기생애와 교육

바이츠만은 1874년 11월 서부 러시아의 낙후된 작은 마을인 모톨에서 목재 운송업을 하던 가난한 에제르 바이츠만의 15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가 자란 곳인 모톨은 울창한 숲 가까이 있었기에 어린시절부터 나무를 사랑해 평생 그 사랑을 유지했다. 그는 청년시절을 아버지의 뗏목을 타면서 보냈는데 이 뗏목은 강을 따라서 발트 해의 항구까지 가는 것이었다. 빈곤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모는, 자녀들이 어린시절에 엄격한 유대인의 정통 학교과정을 이수하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1명의 자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과학자·외과의사·치과의사·기술자·교육자가 되었다.

바이츠만은 11세가 되자 근교의 핀스크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의 탁월한 과학적 재능이 통찰력 있는 과학주임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는 대학입학 허가는 받았지만(1891), 유대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대학 할당제로 고민하다가 화학공부를 위해 러시아를 떠나 독일과 스위스로 갔다. 과학과 러시아어를 가르치면서 집에서 송금해주는 적은 돈으로 그곳에서 그럭저럭 생활했다. 스위스의 프리부르에서 우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1900), 그뒤 제네바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쳤고 동시에 유기화학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염료와 방향제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1890년대 말기 몇 가지 특허권을 얻은 연구 성과물을 처분해 만성적인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났고 그의 동생들이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1900년 제네바에서 의학도인 베라 카츠만을 만났으며 6년 뒤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바이츠만은 맨체스터대학의 과학교수로 임명되면서 1904년 영국에서 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옥수수에서 용제(아세톤)를 추출해내는 과정을 고안해서 영국의 군수산업에 큰 기여를 했다.

1916년 당시 영국 정부는 아세톤(코르다이트 폭약의 가장 핵심적인 성분)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그가 당시에 영국 정부와 추진하고 있던 시온주의 정책협상에 이러한 업적이 크게 기여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화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실지로 그가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분야는 정치였다. 그는 젊은시절 부친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 경건파와는 다른 유대인의 민족주의 문화와 이상을 받아들였다. 사춘기의 정열로 가득 차 있던 그는 11세 때, 유대민족은 반드시 시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히브리어로 써서 자신의 히브리어 선생에게 보냈다.

정치입문

그는 학창시절과 교직생활을 거친 뒤 시온주의 정치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우간다의 논쟁'에서 현대 시온주의의 창설자 테오도르 헤르츨에 반대하는 '젊은 시온주의자'의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우간다의 논쟁'은 동부 아프리카에 유대인의 농경정착지를 마련해줄 것을 제의한 영국의 제안에 대한 논쟁으로서 1903~05년에 벌어진 것이었다. 1905년 총회(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지만, 1914년까지 이 운동의 부수적인 역할만 수행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그는 영국 정부의 밸푸어 선언(1917. 11)을 이끌어내는 매우 중요한 협상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선언의 내용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족국가의 설립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동안 남부 트란스요르단에 위치한 아카바로 여행을 했다(1918. 6). 거기에서 자즈 지방의 아미르 파이살(후에 이라크의 왕)을 만나 유대인과 아랍인의 협력을 논의했다.

그들은 1919년 7월 베르사유 평화회의중에 다시 만나서 서면합의에 이르렀다. 참관인으로서 바이츠만은 산레모 연합국 회담에 참석했으며, 이 회담에서 밸푸어 선언이 공인되었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권이 영국에 일임되었다(1920)(산레모 회의, 파리 평화회의). 1917년부터 영국의 시온주의 연맹의 총수로 활약해왔던 바이츠만은 1920년 세계 시온주의 기구의 총수가 되었다.

1921년 이후부터 그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대중집회를 열어 시온주의의 이념을 강론하면서 기금을 호소했다. 바이츠만의 협상능력은 1920년대에 강한 도전을 받았다. 영국은 태동 단계에 있던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야기하는 제반 문제점과 치안상의 문제가 점차 가중되어감에 따라,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지지하기로 했던 약속사항에서 점차 후퇴하기 시작했다. 불굴의 지도자였던 바이츠만도 영국 정책의 변동, 아랍과 유대인의 폭동 및 시온주의자들의 상호 파괴적인 반목과 투쟁 등 끊임없는 난맥상에 시달렸다.

극단적인 시온주의자들과의 투쟁

결국 극단주의 정치가들은 바이츠만의 온건노선에 적대심을 나타냈다.

점진주의 의견에 반기를 든 몇몇 시온주의자들은 그의 정치적 사상과 행적이 영국에 대한 맹종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러한 특성들이 그가 활동했던 영국의 상류사회에서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단언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실현작업에 호의적이던 정책을 바꾸겠다고 발표하자 전세계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솔하던 그의 권한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30년 분개하여 사임했지만, 설득에 의해 계속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931년 의회에서 그는 불신임 투표에 회부되어 시온주의 기구 및 1929년에 그가 창설했던 조직을 확장한 단체인 유대인 정부기관의 의장으로 재선되지 못했다.

그는 영국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의 레호보트에 다니엘 시에프 연구소를 설립해(1934) 다시 과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보다 앞서 남아프리카를 여행했으며(1931), 나치의 출현 이후에는 독일 내에 살고 있는 유대인과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대대적인 노력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1933).

1935년 선거에 의해 다시 집권하게 된 바이츠만은 반 조각의 빵이라도 전혀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유대인과 아랍인의 2개 영역으로 분리하는 영국의 왕실조사위원회의 권고안을 지지했다(1937). 결국 그 위원회의 계획이 유대인들의 반대보다는 오히려 아랍인들의 반대 때문에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정책은 영국의 이익에 비겁하게 굴종하는 것이며 소심한 것이라고 반대파들은 그를 격렬히 비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바이츠만은 끊임없이 영국군에 유대인 여단을 창단할 것을 주장해 결국 성사시켰다.

그가 관리하고 있었던 다니엘 시에프 연구소에서 기본적인 조제약을 공급해 연합군에 도움을 주었으며, 합성고무 제조법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 정부와 협의했다. 그의 아들 미카엘은 영국 공군장교로서 복무하던 중 1942년 전사했다.

바이츠만은, 유대인 반대자 집단이 팔레스타인 주둔 영국군에 대항해 벌이는 격렬한 저항운동은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이라고 비난했다(1945). 이 비난을 빌미 삼아 시온주의자의 적대파들은 바이츠만이 친영국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다시 세계 시온주의 조직의 의장직을 상실하게 되었으며(1946), 그뒤로는 지도자의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계속 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

이스라엘의 대통령

1948년 초기에 공식적인 직위를 박탈당하기는 했지만, 시온주의 대표자들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중대한 회담을 위해 그를 워싱턴에 파견했다.

바이츠만은 이스라엘의 국가설립을 위태롭게 하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미국 행정부에서 포기하게 하고, 또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네게브를 이스라엘의 영토에서 제외시키는 제안을 선행하도록 설득했다. 그의 개입으로 인해 미국은 이스라엘을 공인된 국가로 승인하게 되었고(1948. 5. 14), 1억 달러의 차관도 승인했다.

그해 9월 바이츠만은 임시국가평의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2월 이스라엘 국가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정치투쟁으로 지쳐버렸고 건강은 나빠졌으며 기력을 상실해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그는 전후 몇 년 간은 일선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오랫동안 병으로 시달리다 1952년 11월에 사망했다. 레호보트에 있는 자신의 땅에 국장으로 안장되었으며 2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장례식에 운집했다.

평범하고 꾸민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덤이지만 매년 수십만 명의 방문객들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