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록

몽유록

다른 표기 언어 夢遊錄

요약 현실에 실재하는 인물이 꿈에서 겪었다는 일을 구성의 형식으로 삼은 소설.

꿈에서의 경험이 소설의 중심 줄거리이고, 꿈꾸기 전과 깨고난 뒤는 소설 전개를 위한 도입부와 결말이다.

꿈의 기록은 일찍부터 나타났으며, 일정한 구조를 갖춘 문학갈래로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이다.

먼저 살펴볼 작품은 남효온(南孝溫 : 1454~92)이 지은 〈수향기 睡鄕記〉이다. 자신이 몽유자(夢遊者)가 되어 시성(詩城)·취향(醉鄕)을 지나 수향에 이르러 중국 역대의 인물들을 만나고 돌아와 천군(天君)에게 보고했다는 내용이다.

짧은 글이면서 설명이 앞서고 사건 전개의 묘미를 갖추지 못해 몽유록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의(沈義 : 1475~?)의 〈대관재몽유록 大觀齋夢遊錄〉은 몽유록의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최치원을 천자(天子), 을지문덕을 수상(首相), 이제현을 좌상(左相), 이규보를 우상(右相)으로 하여 문장왕국(文章王國)을 꾸민 뒤 중국 문장왕국의 천자 두보(杜甫) 일행이 방문했다고 했다. 자신도 그 나라에 가서 크게 인정받고 공을 세웠다는 등,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이 실현되는 상상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마음껏 펼쳤다.

임제(林悌 : 1549~87)가 지은 것으로 보이는 〈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은 몽유록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단종(端宗)이 아직 신원되지 않은 시기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했다. 몽유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전란의 책임과 후유증을 묻는 데 적절하게 이용되었다. 윤계선의 〈달천몽유록 達川夢遊錄〉은 임진왜란 때의 패전지에 가서 죽은 병사들의 원망을 들었다는 내용이다.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피생몽유록 皮生夢遊錄〉에서는 임진왜란 때 죽어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들의 처리를 두고 일어난 비리를 문제삼았다. 전후의 몽유록은 가끔 보이는 한글본이 눈길을 끌 뿐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근대에 들어서 몽유록은 우회적인 비판 방법으로 인식되면서 다시 중요한 갈래로 부각되었다.

몽유록은 가끔 신문이나 잡지에 실려 논설을 대신하기도 했다. 잡지에 실린 몽유록은 홍촌나생(弘村羅生)의 〈몽유고국기-교육자토벌대 夢遊故國記-敎育者討伐隊〉(대한학회월보 제36호, 1908. 4)를 들 수 있다. 외국에서의 고국에 대한 근심을 전한 것으로, 몽유록의 전통적인 수법을 계승하지 못했으며 지면의 제약 때문에 장편이 되지도 못했다. 1908년 단행본으로 간행된 유원표(劉元杓)의 〈몽견제갈량 夢見諸葛亮〉은 장편 몽유록을 재현하는 구실을 했다.

과거에는 동양이 앞섰음을 잊지 말고 중국과 함께 쇄신하여 서양문명 가운데서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라는 내용이다. 1909년 7월 15일~8월 10일 〈대한매일신보〉 국문판에 연재된 〈지구성미래몽 地球星未來夢〉은 망국을 근심하고 구국의 방책을 찾고자 한 것으로, 신문에 실린 작품으로서는 장편이다. 1911년 박은식이 망명지인 만주에서 지은 〈몽배금태조 夢拜金太祖〉는 대종교(大倧敎) 주도하에 전개되던 독립운동의 정신교육 교재로 삼기 위해 쓴 것으로 전형적인 몽유록이다.

금나라도 우리 민족이 세웠다고 보았기 때문에 꿈에 금 태조를 만나 민족의 발전을 다짐한 것을 몽유록으로 꾸몄다. 역사와 사상을 다룬 논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므로 읽기 어렵다. 1915년 신채호가 망명지 중국에서 지은 〈꿈하늘〉도 몽유록이다. 단기 4240년(1907) 평범한 한국인이라는 의미의 '한놈'이 천상계의 거대하고 기이한 광경을 보았다고 하여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역사적인 인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부자유를 떨쳐내고 민족의 해방과 영광을 되살리는 길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몽유록은 근대문학으로 이어질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교술문학의 범위가 대폭 축소되자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