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드 모파상

기 드 모파상

다른 표기 언어 (Henry-René-Albert-)Guy de Maupassant 동의어 모파상
요약 테이블
출생 1850. 8. 5
사망 1893. 7. 6,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자연주의 계열의 단편 및 장편 소설을 썼으며, 프랑스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부모의 결혼 실패로 그는 결혼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의 단편소설에는 어리석고 박해받는 남편과 아버지 없는 외로운 아이가 자주 등장한다. 1892년 목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죽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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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플로베르에게서 받은 문학수업
  4. 장년기와 작품
모파상(Guy de Maupassant)
모파상(Guy de Maupassant)

개요

자연주의 계열의 단편 및 장편 소설을 썼으며, 프랑스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초기생애

귀스타브 드 모파상과 그의 아내 로르 사이에서 2명의 자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미로메스닐 성에서 태어났다는 어머니의 주장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부모가 그 성을 빌렸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가 실제로 그 성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입증할 수 없음). 동생 에르베는 1856년 그랭빌이모빌에 있는 블랑 성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노르망디인이었고, 아버지는 하급귀족 가문출신이었다. 이름에 붙어 있는 '드'라는 관사는 프랑스 혁명 때 떼어졌지만, 결혼하기 직전 신부(新婦)의 압력으로 되살아났다. 이 결혼은 실패였다. 그당시 프랑스에서는 이혼에 대한 규정이 없었지만, 부부는 15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맏아들 기가 11세 되던 해에 헤어졌다.

기는 어머니 편을 들었고 효자였지만 아버지한테는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유별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부모의 결혼 실패는 아들의 인생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이로 인해 그는 결혼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의 단편소설에는 어리석고 박해받는 남편과 아버지 없는 외로운 아이가 자주 등장하게 된다.

모파상 일가는 자유사상을 신봉하는 집안이었지만, 그가 받은 최초의 교육은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13세 되던 해 교구목사한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배운 뒤, 그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모두 학생으로 받아들이는 이브토의 작은 신학교로 보내졌다. 처음부터 그런 형태의 생활에 확고한 반감을 느꼈기 때문에, 일부러 몇 가지 사소한 교칙을 위반해 1868년에 퇴학당했다. 그뒤 르아브르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해 이듬해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869년 가을에 파리에서 법률공부를 시작했지만, 독일과 전쟁이 벌어지자 공부를 중단하고 자원입대했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사병으로 복무하다가 나중에 아버지가 손을 써서 보급 부대로 전속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체험은 가장 뛰어난 몇몇 단편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1871년 7월에 제대한 뒤에 파리에서 다시 법률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를 도와서 해군부에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것은 그가 변호사 자격을 얻을 때까지 생활비를 보장해주려는 의도였다. 그는 관료사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사회적으로는 승진을 거듭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대로 1879년에 아들을 공공교육부로 옮겨주었다.

7살의 기 드 모파상
7살의 기 드 모파상

플로베르에게서 받은 문학수업

모파상의 어머니 로르는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젊었을 때 가장 친했던 알프레드 르 푸아트뱅의 누이동생이었다.

오빠가 1848년에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로르는 플로베르와 함께 평생 동안 다정한 관계를 유지했다(모파상의 전기작가들 가운데 몇 사람은 그가 로르와 플로베르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주장했지만,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납득할 만한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했음). 로르는 1867년에 아들을 크루와세에 있는 플로베르에게 보내 인사를 시켰다. 전쟁이 끝난 뒤 아들이 파리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플로베르에게 아들을 돌보아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이 모파상을 작가로 만든 도제수업의 시작이었다. 플로베르는 파리에 머물 때마다 그를 일요일 오찬에 초대해 문체에 대한 강의를 하고, 그의 미숙한 습작을 고쳐주곤 했다. 또한 일요일 오후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방문하던 에밀 졸라, 이반 투르게네프, 에드몽 드 공쿠르, 헨리 제임스 같은 당대의 일류 작가들에게 그를 소개해주었다.

플로베르는 모파상에 대해 "그는 내 제자이고, 나는 그를 친아들처럼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들의 관계가 지닌 2가지 성격을 간결하게 압축해 표현한 말이었다.

플로베르는 작가 모파상을 격려하고 감화시켰을 뿐 아니라, 파경을 맞은 부부의 아들에게 양아버지 역할도 해주었다. 1880년 플로베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모파상은 '제자'인 동시에 '아들'로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졸라는 젊은시절의 모파상을 "센 강에서 배를 타고 재미삼아 하루에 80km나 노를 저을 수 있는 대단한 뱃사람"으로 묘사했다.

모파상은 바다와 강을 무척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 무대는 대부분 바다나 강이고 소설 속에 항해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나온다Mouche. 그는 관료사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무원시절은 생애중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는 틈이 나면 센 강에서 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면서 시간을 보냈다. 〈파리 Mouche〉(1890) 같은 단편소설을 보면, 배를 타는 것은 단순한 뱃놀이가 아니었고 모파상과 그의 친구들이 뱃놀이에 데려간 여자들은 대개 창녀이거나 미래의 창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린시절에 '완전한 순결'을 지켰고, "16세가 된 뒤에야 처음으로 여자를 알았다"고 자랑했는데, 그 말이 맞건 틀리건 간에 그의 놀랄 만큼 난잡한 행동이 파리에서의 삶의 초기에 시작된 것만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20대 초반에 당시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널리 퍼져 있던 질병의 하나인 매독에 걸린 것을 알았다. 이 병이 선천성인지 아니면 방종한 생활의 결과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생이 어렸을 때 같은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선천성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해준다.

그는 치료받기를 완강히 거부했고, 그결과 병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짙은 그림자를 그에게 던졌을 뿐 아니라 신경쇠약으로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그의 동생도 역시 신경쇠약에 시달린 적이 있다. 플로베르한테 도제수업을 받는 동안에 이름 없는 지방 잡지에 가명으로 1, 2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전환점은 플로베르가 죽기 1개월 전인 1880년 4월에 왔다. 모파상은 졸라가 이끄는 6명의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전쟁에 관한 단편소설을 각각 1편씩 써서 〈메당의 저녁 Les Soirées de Méda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모파상이 이 책에 기고한 〈비계덩어리 Boule de suif〉는 6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을 뿐 아니라, 모파상이 쓴 모든 단편 중에서도 아마 가장 뛰어난 작품일 것이다. 이 단편의 착상과 구성 및 문체에는 플로베르의 냄새가 배어 있지만 '제자'는 모방자가 아니라 계승자였다. 그는 장편소설가인 플로베르한테서 배웠지만, 배운 것을 단편소설에 적합하게 바꾸었다. 〈비계덩어리〉처럼 훌륭한 단편소설의 특징은 절제와 균형이다.

장년기와 작품

〈비계덩어리〉가 발표되자마자 신문사에서 원고 청탁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관청을 그만두고, 그후 2년 동안 〈골루아 Le Gaulois〉·〈질 블라 Gill Blas〉에 기사를 썼다. 〈질 블라〉는 겉보기에는 신문이었지만 뉴스를 거의 싣지 않았다. 이 신문의 주요목표는 짜릿한 단편소설로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 신문은 부업으로 젊은 고급 창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오리종탈'(수평선)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의 많은 단편소설이 이 신문에 맨처음 실린 것은 결코 부적절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1880~90년의 10년 동안 그는 놀랄 만큼 많은 글을 썼다. 이 시기에 약 300편의 단편소설과 6편의 장편소설, 3권의 여행안내서, 유일한 시집, 그리고 약간의 잡문이 발표되었다.

단편소설들은 여러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870년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을 다룬 것, 노르망디 농민들을 다룬 것, 관료사회를 다룬 것, 센 강변의 생활을 다룬 것, 서로 다른 계층의 감정 문제를 다룬 것, 그리고 〈오를라 Le Horla〉(1887) 같은 후기 소설에서 약간 불길한 전조를 보이는 환각을 다룬 것 등이다.

이 소설들을 한데 모으면 1870~90년의 프랑스인의 생활상이 포괄적으로 드러난다. 작품에는 개인적인 요소가 강하게 담겨 있어서 전기작가들은 그의 소설에 나오는 구절을 마치 자서전이나 일기에서 발췌한 인용문처럼 다루었다. 개인적 요소는 〈벨 아미 Bel-Ami〉(1885)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처음에는 작가와 그가 창조한 비열한 주인공 사이에 큰 차이가 있고, 유일한 공통점은 바람기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정도 위장은 했어도 실제로 그가 벨 아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가 창조한 주인공과 똑같은 건강과 난폭한 승리를 누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주었으리라는 것을 독자는 깨닫게 된다.

그는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과 자신의 연관성을 숨겼지만, 다른 데서는 일부러 그것을 부각시켰다. 1932년에 발견된 초판본에는 그가 여자친구에게 바친 헌사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벨 아미가 오마주 부인에게'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생활이 윤택해지자 젊은시절의 기쁨이었던 작은 보트를 요트로 바꾸고 '벨 아미'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생활이 윤택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한 억척스럽기로 유명한 노르망디 사업가였다. 그당시에는 소득세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연간수입은 요즘 돈으로 15만 달러는 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는 이 돈을 최대한 활용했다. 파리에서 여자들과 밀회할 때 이용하는 별관이 딸린 아파트를 갖고 있었으며, 에트러타에 있는 집에는 손님을 자주 초대해 환대했고, 리비에라에도 2채의 저택을 갖고 있었다. 1881년 여행을 시작해 프랑스령 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방문했으며, 2년 뒤에는 요트를 갖게 되었다.

1889년에는 기구를 타고 2번 비행했다. 같은 해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국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헨리 제임스의 초대를 받아 식당에서 점식 식사중에 갑자기 옆 탁자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키면서 저 여자를 '사달라'고 부탁해 제임스를 깜짝 놀라게 했다.

프랑스 평론가인 폴 레오토는 그를 '완전한 색광증 환자'라고 불렀다.

그는 매춘굴과 창녀들에게 강하게 매혹되었는데, 이것은 〈비계덩어리〉만이 아니라 〈텔리에의 집 La Maison Tellier〉(1881) 같은 작품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성공한 작가로서 에르민 르콩트 뒤 누이, 알리그리 후작부인, 포토카 백작부인 같은 상류계층 여자들과 좀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자 그의 소설에는 시각의 변화가 일어났다. 농민에서 상류계층으로 주인공이 바뀌었고, 매춘굴에서 상류층 여자의 거실로 무대가 바뀌었다.

겉으로는 운동선수처럼 건장하고 건강해보였지만, 그의 글은 건강에 대한 한탄, 특히 눈병과 편두통을 한탄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더 우울해졌다. 처음에는 재미삼아 여행을 시작했지만, 한때는 아무 걱정거리도 없이 즐거웠던 휴가가 정신상태 때문에 강박관념의 지배를 받는 방랑증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그는 항상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나머지 집에 앉아 있다가도 느닷없이 프랑스의 다른 지역으로 달려가거나 요트를 타고 무작정 항해를 떠나고는 했다.

1888년 그의 가정에 중대한 위기가 닥쳤다. 그의 동생은 지능이 모자랐기 때문에(요즘 같으면 정신박약아라고 불릴 정도로) 묘목장가꾸기보다 더 높은 지능을 요구하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묘목장을 관리하게 하고 자금도 대주었다.

그런데 1888년에 동생 에르베가 갑자기 심한 정신이상을 일으켰다(가족은 '일사병'이라고 꾸며댔음). 그는 동생을 일사병에서 회복시키기 위해 진료소로 가자는 구실을 붙여 파리의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다. 에르베는 진상을 알게 되자 예언적인 말을 내뱉았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형이야. 알겠어? 우리 가족 중에서 미치광이는 바로 형이라고." 에르베는 1889년 11월 13일에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그는 동생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의 슬픔이 순수했다고는 해도 자신의 상황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1892년 1월 2일에 그는 건강 때문에 리비에라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가 가까이에 머물다가 목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했다.

의사들이 불려왔고, 그의 어머니는 마지못해 그를 정신병원에 수용하는 것에 동의했다. 2일 뒤 그는(일부 기록에 따르면 난폭한 정신병 환자에게 입히는 구속의를 입고) 파리에 있는 불랑슈 박사의 병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43번째 생일을 맞기 1개월 전에 그 병원에서 죽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자 단편소설 작가로서 인기가 쇠퇴했고, 프랑스보다는 영국과 미국 및 소련에서 그의 작품이 더 많이 읽힌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진정한 업적인 모든 계층의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뛰어나고 상업적인 새로운 단편소설의 창조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