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원파

명원파

다른 표기 언어 School of Mingyüan Painters , 明院派

요약 중국 명나라가 원을 이어 들어선 뒤 화원이 설치되기 이전에 궁중에 모아들인 일단의 화가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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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교인물화
  2. 산수화
  3. 화조화

이들이 그린 그림의 풍격과 형식이 송대 화원의 것을 본받은데다가 뚜렷한 시대적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점차 '절파'의 그림과 함께 명대 전기의 화단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미술사가들은 이들을 '명원파'라고 부른다. 명대 초기 홍무·영락 연간에 이미 이름을 떨친 이들이 있었으며 선덕·성화·홍치 연간에는 수많은 대가들이 배출되어 궁정회화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의 그림은 송대 선화·소흥 연간의 화원에 견주어지기도 한다. 명원파는 정덕 연간 이후로 점차 그 기세가 약해지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종교인물화

상관백달이 그린 난징[南京] 바오언 사[報恩寺]의 낭화와, 상희가 그린 베이징 융안 사[永安寺]의 벽화가 절세의 수작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단지 베이징 파하이 사[法海寺]의 정전 벽화와 상희의 〈관우참장도 關羽斬將圖〉를 통해 그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화가들이 그린 명대 초기 황제들의 초상화 몇 점과 왕여옥이 그린 〈도연명상 陶淵明像〉을 통해서도 그들의 심오한 솜씨를 살필 수 있다. 또한 예단의 〈빙방도 聘龐圖〉 등 일련의 작품들은 명대 선종의 '초은'의 뜻을 받들어 그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인물·산수·건축물·말 등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켜냄으로써 예술적 호소력을 증대시킨 것은 인물화에 있어서 커다란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산수화

이재·왕악·주단 등은 남송의 마원·하규의 그림을 계승했으며, 곽희의 화법을 계승한 이들도 있으나 모두 황제의 뜻에 부합되는 그림만 그렸다. 때문에 그들의 그림은 마원이나 하규의 정교함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대진이나 오위와 같은 힘차고 활달한 기상도 부족하여 그 성취가 그리 뛰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그림은 중국과 주변 나라들간의 문화교류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일본의 대화가인 셋슈[雪舟], 셋손[雪村], 가루노 모토신[狩野元信] 등은 모두 명원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야키탄은 중국에서 이재 등과 함께 그림 공부를 하기도 했다. 명원파는 조선의 회화예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때문에 명원파의 산수화는 여전히 중시되고 있다.

화조화

명원파의 회화예술은 화조화에서 가장 큰 성과를 이뤘다.

변경소·손융(孫隆)·임량(林良)·여기는 그 대표적인 화가이다.

변경소의 〈죽학도 竹鶴圖〉 같은 작품은 그 솜씨가 심오하여 은은하면서도 대범한 기품이 배어나오며 정교하고 화려하다. 이는 송대의 원체화를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손융은 〈화조초충도 花鳥草蟲圖〉 등에서 몰골법과 함께 다양한 채색기법을 사용하여 수묵이 윤택하고 생기가 가득한, 그야말로 어느 누구도 본뜨지 않은 자기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창조했다.

임량은 붓을 휘둘러 새·짐승·수목을 단숨에 그려냈는데 그 힘찬 기세가 마치 초서를 보는 듯하다. 그의 〈웅응도 雄鷹圖〉 등을 보면 그 변화무쌍함과 굳센 기상이 강하게 느껴진다. 당시 초서식 기법으로 이름을 떨친 화가는 하창·임량·계례·악정의 4명이 있으나 그중 임량이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힌다. 여기는 임량에 비해 조금 늦은 시기의 화가로서 그 성취가 훨씬 뛰어났다.

〈계국산금 桂菊山禽〉·〈행화공작 杏花孔雀〉·〈잔하응로 殘荷鷹鷺〉·〈설매서조 雪梅棲鳥〉 등의 그림은 때로는 정교한 묘사와 채색이 돋보이는가 하면 때로는 붓에 먹을 듬뿍 찍어 그린 활달함이 두드러지고 원체화의 윤곽선을 그대로 이어받은 데다가 정교한 묘사까지 갖추고 있다. 따라서 임량의 경지를 뛰어넘은 새로운 발전의 면모를 보여준다.→ 명대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