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클렐런

매클렐런

다른 표기 언어 George Brinton McCle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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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6. 12. 3, 미국 필라델피아
사망 1885. 10. 29, 뉴저지 오렌지
국적 미국

요약 미국 남북전쟁(1861~65) 때 북군의 장군.

남북전쟁 첫해에 능숙하게 북군을 재정비했으나 북군의 군사적 우세를 활용하는 데 거듭 실패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다.

1846년 뉴욕 주에 있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뒤 멕시코 전쟁(1846~48)에 참전했고, 1848년~51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 공병학을 가르쳤다. 그뒤 철도와 군사시설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유럽의 전술을 살펴보고 보고하기 위해 크림 전쟁(1855~56)에도 파견되었다.

1857년 군제대 후 일리노이센트럴철도회사의 기술부장, 1860년에는 오하이오-미시시피 철도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는 주권(州權)을 지지하는 민주당원이면서도 동시에 강력한 연방제 유지론자였다. 1861년 4월 남북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 뒤, 다시 정규군에 입대해 버지니아 서부 방어임무와 함께 오하이오 관구를 지휘하게 되었다. 7월 13일 이 지역의 남군이 패퇴하자 매클렐런은 '서부의 청년 나폴레옹'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같은 달 제1차 불런 전투에서 북군이 참패하자 그는 뒤에 포토맥군의 지휘를 맡아 수도 방어와 버지니아 동부 및 북부의 남군을 섬멸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1월 매클렐런은 장군으로 승진해 윈필드 스콧 장군의 후임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뛰어난 조직력과 병참술로 패배의 혼란에 빠져 있던 북군을 재정비해 높은 사기, 능력있는 참모진, 효율적인 지원업무 체제를 갖춘 전투부대로 되살리는 데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매클렐런은 아직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해 가을 남군에 대한 공세를 거부했다. 매클렐런의 이같은 소극적인 행동에 당황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유명한 일반군사명령 1호(1862. 1. 27)를 내려 모든 군대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다.

'리틀 맥'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매클렐런은 링컨에게 2개월 정도 공격을 연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리치먼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버지니아의 요크 강과 제임스 강 사이에 있는 반도(半島)를 이용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반도회전(1862. 4. 4~7. 1)에서 매클렐런은 패한 적이 없을 뿐더러 실제로 여러 번 승리했으나, 지나치게 신중해 마치 적을 추격하기를 꺼리는 듯했다. 리치먼드를 몇 마일 앞둔 지점까지 진격하면서 그는 대치하고 있는 남군의 숫자를 시종일관 과대평가했다.

로버트 E.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이 매클렐런의 북군을 섬멸할 목적으로 총공격을 가하며 7일전투(6. 25~7. 1)를 개시하자 그는 후퇴했다. 링컨은 리치먼드를 점령하지도 못하고 적군을 결정적으로 쳐부수지도 못한 매클렐런에게 낙담해 포토맥 부대를 반도에서 철수시켰다. 제2차 불런 전투(8. 29~30)에서 북군이 크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지면서 그곳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매클렐런은 수도 방어부대의 지휘를 요청받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조직력을 발휘해 북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리 장군이 메릴랜드 북부로 이동하자 매클렐런의 부대는 앤티텀 전투(9. 17)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남군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역시 신속한 작전을 취하지 않아 리 장군의 부대를 섬멸할 기회를 놓쳤다. 이에 격노한 링컨은 11월 매클렐런을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매클렐런 자신은 전쟁을 실패라고 규정하면서 민주당의 정강(政綱)을 비난했지만 186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선거 당일 그는 퇴역했으며, 그 후 유럽 여행을 떠났다. 1868년 귀국해 뉴욕 시의 부두관리부에서 수석 기사로 근무했으며(1870~72), 1872년에는 애틀랜틱-그레이트웨스턴철도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1877년에 뉴저지 주지사가 되었고 그 뒤에는 여행을 하고 회고록을 쓰면서 말년을 보냈다. 그에 대한 전기문으로는 W. W. 해슬러 2세의 〈연방의 수호자 조지 B. 매클렐런 장군 General George B. McClellen, Shield of the Union〉(1957)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