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시

매시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Ferguson Massey
요약 테이블
출생 1856. 3. 26, 아일랜드 런던데리 리머배디
사망 1925. 5. 10, 뉴질랜드 웰링턴
국적 뉴질랜드

요약 뉴질랜드의 정치가.

1912~25년까지 총리를 지냈으며, 토지균분론자들의 이익을 오랫동안 대변했고 동시에 좌익운동의 반대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그의 개혁당 출신 장관들이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1870년에 뉴질랜드로 이민온 이후, 그는 오클랜드 근교에서 농업에 종사했으며 농민조직의 지도자로 일했다. 1894년에 보수당원으로서 의회에 진출했으며 1894~1912년까지 자유당 내각에 대항한 보수야당의 지도자였다. 1912년 총리가 되었고, 자유 토지 보유자들이 원래의 가격으로 땅을 사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안을 즉시 인준했다. 그가 장관으로 재직한 첫해인 1912년 와이히에서 광부들이, 1913년 웰링턴에서 부두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노동운동을 지나치게 탄압했으며, 이것이 1916년 노동당 내각의 출범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민원봉사 업무를 비정치적인 민간단체에 일임시켜 연방행정 업무를 개선했다. 조지프 워드 경이 이끄는 자유당과 연합함으로써 매시는 1915년에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그는 대영제국의 전시내각(1917~18)에 참가해 1919년의 파리 평화회담에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여기에서 뉴질랜드가 국제연맹의 회원국이 되었다. 그는 대영제국 연방 내에서 자치령이 되는 개별적인 독립상태를 반대했다. 전쟁 후 영국이 그들의 농산물에 대한 수요를 대폭적으로 삭감하여 발생한 가격폭락으로 농민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 그들은 토지가격에서 통화팽창에 직면하게 되었고, 제대군인들의 토지요구가 증가하게 되어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었다. 육류 관리청(1922)과 유제품 수출관리청(1923)을 설치해 이러한 제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그가 총리 임기를 마치던 해에도 물가가 오르고 이로 인해 지방과 도시의 불안은 계속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