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

만월대

다른 표기 언어 滿月臺

요약 고려의 궁궐 터. 고려의 정궁으로, 919년 태조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궐한 이래 1361년 소실될 때까지 고려 왕의 주된 거처였다. 본래 특정한 명칭은 없었으나 고려 멸망 이후 조선시대부터 만월대라 불리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남북 공동발굴 사업이 7차례 진행되었고, 2018년 9월말 8차 공동발굴 사업이 재개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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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위치
  3. 구조

개요

고려의 정궁. 919년(태조 2) 태조가 송악산 남록(南麓)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후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 왕의 주된 거처였다.

만월대와 송악산의 현재 모습
만월대와 송악산의 현재 모습

위치

만월대의 위치는 남록에 있는 높은 곳으로 좌우에 구릉이 둘러 있는 용호지세(龍虎之勢)이며, 그 앞에는 주수(主水)와 객수가 합류되어 흐르고, 남으로는 주작현(朱雀峴)을 넘어서 멀리 진봉산(進鳳山)이 바라다보이는 사신상응(四神相應)하는 명당이다. 일반적으로 평지에 건립되는 왕궁과는 달리 산의 지세에 따라 몇 개의 단지를 형성해 세워졌으므로 매우 특이하다.

구조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건립된 궁성 주위에는 13개의 문이 있었는데, 정동문(正東門)인 광화문은 주요 도로와 연결되었다. 광화문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궁궐의 정남문(正南門)인 승평문(昇平門)에 이르고, 이곳을 지나면 주수가 되는 광명천의 다리인 만월교(滿月橋)가 있다. 만월교를 건너 신봉문(神鳳門)을 들어서면 넓은 뜰이 있고 동에는 세자궁으로 통하는 춘덕문이, 서에는 왕의 거처로 통하는 태초문이 있다. 이곳에서 제3문인 창합문을 지나면 지세 때문에 뜰이 협소해지고 정면에 50여 척이나 되는 높은 단 위에 정전인 회경전이 있다.

회경전 뒤 더 높은 곳에는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던 원덕전(元德殿)이 있다. 회경전 서북쪽에는 천자의 조서를 받고 사신을 대접하던 건덕전이 있고, 북쪽에는 침전인 만령전(萬齡殿)이 있다. 이밖에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던 장령전(長齡殿)과 연영전(延英殿) 등이 있었다. 만월대는 궁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했으며, 지금은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 기단지, 초석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