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마르셀

다른 표기 언어 Étienne Marcel
요약 테이블
출생 1316경
사망 1358. 7. 31,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부르주아 지도자, 의류상, 파리 상인들의 감독관.

마르셀(Étienne Marcel)
마르셀(Étienne Marcel)

1355~58년 파리 반란 때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한동안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기도 했다. 의류상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유럽 지역에서 사업을 벌인 부호 피에르 마르셀(1305 죽음)의 손자였다. 아버지 시몽이 죽자(1333경) 가업을 이어받아 1350년경에는 노트르담의 대(大)동업조합 감독관, 1354년에는 전(全)파리 상인감독관이 되었다.

1355년 11월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백년전쟁(1337~1453)을 재개하기 위한 돈을 걷으려고 삼부회를 소집하자, 그는 걷은 돈을 의회가 관리해야 한다고 제안함으로써 왕에게 대항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왕이 포로가 되자(1356. 9) 1357년초 삼부회를 주도해 왕실의 탐관오리들을 내쫓으려 했으며 삼부회가 왕세자(뒤에 샤를 5세)를 감독하게 하려 했다. 샤를은 이러한 혁명적인 분위기를 다소 진정시켰지만 그 또한 삼부회가 관리하고 있던 돈을 쓰고 싶어했다.

1357년 11월 나바라의 악인왕 카를로스가 아를뢰 성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도왔고 카를로스의 지원을 받아 왕세자를 굴복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왕세자가 거느렸던 장군 2명이 마르셀에게 암살당하자 놀란 왕세자는 그가 정부의 실권자라 믿게 되었다. 왕세자가 파리를 떠난 뒤 그는 시민을 무장시켜 파리를 지켰고 1358년 5월 귀족에 대항한 자크리와 힘을 합쳤다. 그러나 6월에 자크리가 진압되자 그의 인기와 권력도 빛을 잃었다.

절망에 빠진 마르셀은 플랑드르와 잉글랜드에까지 도움을 청했으나 7월에 암살당했다(→ 자크리). 말기에 그는 스스로 왕이 되려 했으며 또한 나바라 왕을 편들었던 것처럼 처음에 가졌던 개혁 이상과는 다른 행동을 했다. 그의 실패 원인은 파리 밖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한 것과 협상을 온건하게 추진하지 않아 폭넓은 지지 기반을 얻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