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두

르두

다른 표기 언어 Claude-Nicolas Ledoux
요약 테이블
출생 1736. 3. 21, 프랑스 도르망쉬르마른
사망 1806. 11. 19,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건축가.

프랑스 혁명 직전의 사회이념과 관련된 절충주의적이며 이상향적인 건축을 발전시켰다. J.-F. 블롱델과 L.-F. 트루아르 밑에서 공부했고, 한 카페에 상상력이 풍부한 목조장식을 만들어 건축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곧 인기있는 건축가가 되었다.

1760년대와 1770년대초에 걸쳐, 프랑스 상류계층을 대상으로 혁신적인 신고전주의 양식의 많은 개인주택을 설계했다. 이 가운데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작품으로는 오카르 별장(1764~70), 노르망디에 있는 베누빌 성(1770), 루베시엔에 있는 유명한 바리 부인 저택(1771~73) 등이 있다.

1770년대 중반에 르두는 아르크에스낭의 살린드쇼에 새 제염소 건설과 주변 도시계획을 맡았다. 한가운데 제염소를 중심으로 일꾼들의 주거가 고리 모양으로 둘러싼, 방사상으로 된 동심원 형태의 배치도를 마련했다. 이 계획안은 반도 채 완성되지 않았으나 현존하는 구조물은, 그가 고전적인 건축양식을 낮고 묵직하며 표면을 거칠게 다듬은 모습으로 재창조하기 위해 입방체와 원통형을 매우 단순화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생산 활동을 간편하게 하면서도 노동자들에게 건강하고 안락한 생활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계획한 도시형태는 로버트 오언 등 19세기의 여러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계획했던 비슷한 형태보다도 훨씬 앞선 것이었다.

그의 브장송 극장(1771~73)은 상류층뿐 아니라 평범한 대중들을 위한 좌석까지도 마련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설계였다. 1780년대에 설계한 개인주택들은 기묘한 배치형식, 단절되는 건물입면, 도리아식 건축요소의 파격적인 사용 등에서 재기가 번뜩이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가 후기에 맡았던 가장 중요한 공공사업은 파리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60개의 통행세 징수소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한 세금징수 사무소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건물들을 '파리의 문'으로 불리게 된 여러 기념비적인 관문과 구조물로 바꾸어놓았다. '바리에르'(barrière)라 불렸던 이 통행세 징수소는 프랑스 혁명 전 4년 동안(1785~89) 실제로 50개가 세워졌으나 오늘날 4개만이 남아 있으며, 가장 유명한 것은 빌레트 바리에르이다. 여기에서도 그는 낮고 거대한 기하학적 형태의 주제에 최대한의 관심을 쏟아, 로툰다 형식(돔을 얹은 원통형 건물), 그리스 신전형식, 포티코 형식(지붕이 있는 현관), 그리고 거칠게 다듬은 석조 도리아식 기둥으로 받친 볼트형 앱스(apse 後陣)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건설비용이 너무 엄청나서 공공재정을 파산시키기에 이르렀고 1789년 그 공사를 포기해야 했다. 많은 바리에르들은 프랑스 혁명 때 성난 납세자들의 손에 파괴되어버렸다.

르두 자신은 공포정치 때 체포당했다. 그의 구속과 몇 명의 가족이 죽게 됨으로써 그는 건축가로서 실질적인 활동을 마감했다. 석방된 뒤 말년에는 〈예술, 관습, 입법적 측면을 고려한 건축 L'architecture considéréé sous le rapport de l'art, des moeurs et de la législation〉(1804)을 쓰고 편집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 책에는 자신의 작품들을 직접 새겨 나타낸 판화가 실려 있다.

르두는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가장 독창적인 건축가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힘차면서도 재기가 넘치게 단순화된 기하학적인 형태는 다음 세대에서는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고, 19세기의 파괴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은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