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오치

류사오치

다른 표기 언어 Liu Shaoch'i , 劉少奇
요약 테이블
출생 1898, 후난 성[湖南省] 닝샹 현[寧鄕縣]
사망 1969. 11. 12, 허난 성[河南省] 카이펑[開封]
국적 중국

요약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주석이 되었다. 주석으로 있는 동안 외교적으로도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으나, 최전성기에 문화대혁명으로 숙청,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 1920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함으로써 활동을 시작한 류사오치는 1922년 제1차 전국노동대회의 조직을 지원, 이후 마오쩌둥을 보좌했다. 1925년 중화노동조합총연합회 부위원장, 1928년 중국공산당 노동부장관, 1929년 만주 성당위원회의 주석이 되었다. 1934년에는 마오쩌둥의 홍군을 떠나 반일운동을 선동했고, 1936년 7월부터 당내 주요 이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49년 10월 1일 신정부의 부주석에 지명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생애와 경력
  3. 소련지도자들과의 교분
  4. 실각 이유에 대한 추정
류사오치(劉少奇)
류사오치(劉少奇)

개요

1960년대말 문화대혁명으로 숙청되기 전까지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중국 노동운동 초기부터 적극적인 노동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중국공산당의 창당과 통치전략 수립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1949년 공산혁명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생애와 경력

부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창사[長沙]에서 중학교와 사범학교를 마쳤으며, 1918년에는 중국 북부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2년 후인 1920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했으며, 이어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유학중 1921년에 창당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외국에 유학하면서 넓은 경험을 쌓은 그는 중국공산당 지도자 가운데 보기 드문, 국제주의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1922년에 귀국하여 같은 해 5월 광저우[廣州]에서 개최된 제1차 전국노동대회의 조직을 지원했다.

그후 곧 중국공산당 후난 성 당조직의 비서에 임명되어 마오쩌둥을 보좌했다. 그해말 안위안[安源] 탄광에 가서 광부들을 조직하여 성공적인 파업을 유도했다. 이때부터 그는 노동운동에 점점 더 깊숙이 간여하기 시작했다. 1923년 2월에는 소위 '2·7학살사건'에 대한 동정파업을 주도했으며, 1925년 5월 광저우에서 개최된 제2차 전국노동대회에서 중화노동조합총연합회 부위원장에 당선되었다.

1926년 제3차 전국노동대회에서는 이 대회의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1926년은 노동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해였다. 1927년 4월(4·12쿠데타)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열되자, 중국공산당의 도시 요원들이 국민당 군대에 의해 대량으로 살륙되었고 류사오치와 그의 동료들은 지하로 잠복했다. 그해 4월말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5회 전국대표대회(五全大會)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의 혼란 이후, 당내에서 류사오치의 지위는 급속히 상승되었다.

1928년 중반기에는 중국공산당 노동부장관, 다음해에는 만주 성당(省黨)위원회의 주석이 되었다. 1931년초 상하이[上海]로 가면서 주석직을 그만두었다. 1931년을 즈음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은 도시에서 농촌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는 상하이에 남아 일본의 만주·중국북부 침입에 대항하는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말 류사오치는 장시 성[江西省]으로 가서 마오쩌둥의 부대와 합류했고, 중화노동조합총연합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에는 6전대회 제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五中全會)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한 직후, 대장정중이던 마오쩌둥의 홍군(紅軍)을 떠나 반일운동을 선동하기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1936년 7월 공산당의 사령부가 있던 옌안[延安]에서 '공산당원의 수양에 관하여'(論共産黨員的修養)라는 유명한 강연을 몇 차례 연속해서 했다. 전당원에게 당면한 과제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그는 이 강연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로서의 경험과 백구(白區)에서의 지하활동 경험을 총동원했다.

이때부터 당내 주요이론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1941년 7월에는 '당내 투쟁을 논한다'(論黨內鬪爭)라는 제목으로 또 한 차례의 중요한 강연을 했고 이 강연으로 당내 이론가로서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1943년 류사오치는 중국공산당 권력구조에서 실세로 떠올랐다. 1945년 6월경에는 당무(黨務)에 관한 대변인이 되었고, 중국공산당 제7회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에 대하여'(論黨)라는 제목의 기조연설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마오쩌둥과 장제스[蔣介石]가 충칭[重慶]에서 담판을 벌였는데, 이때 마오쩌둥의 부재시에는 류사오치가 대리주석이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이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류사오치는 신정부의 부주석에 지명되었다.

소련지도자들과의 교분

일단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국제주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소련 지도자들과 교분을 맺고 있던 류사오치가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외교정책상의 강경노선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신중국의 산업화 계획을 세우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외교정책이나 산업화의 진척은 모스크바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1949~54년에 걸쳐 중·소우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52년 10월에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19차 당대회에 중국측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했다.

1954년 8월에 개최된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류사오치는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국가기관에만 국한되지 않고 당으로까지 확대되어 1953년말부터 1954년에 걸쳐 단행된 지방 실력자들의 숙청을 주도했다. 이어 당내에서의 지위가 계속 상승하여 1956년에는 마오쩌둥의 공식적인 후계자 자리를 확보했다.

1958년 5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8회 전국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그는 '대약진운동'이라고 불리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관한 전략을 보고했다. 이 계획은 중국 내에 급속한 산업화의 기초를 닦아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은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 희망했던 것처럼 공업화를 신속하게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고, 이에 따라 정책의 수정이 요구되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산당 총서기직은 유지했지만 주석직을 사임했다. 그 뒤를 이어 1959년 4월에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 취임했다. 류사오치가 주석으로 있는 동안 대약진 운동으로 야기된 농촌경제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조정정책'이 시행되었다. 조정정책은 농민의 개인 보유 땅을 인정하고, 농촌 자유시장의 부활과 그 확대를 통해 농민의 물질적인 이익을 자극하여 농업생산을 회복하려는 정책이었으나 마오쩌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류사오치는 주석으로 있는 동안 소련·파키스탄·가나·쿠바·북베트남·북한 등의 국가지도자들의 방문을 받는 등 외교적으로도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더욱이 1959~66년 사이에는 보다 광범위하게 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최전성기에 문화대혁명(1966~69)으로 숙청되었다. 베이징 시장인 펑전[彭眞]과 정치국 위원인 덩샤오핑[鄧小平] 등 여러 사람이 그와 연루되어 숙청됨으로써 강한 결속력을 자랑하던 중국지도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1968년 10월에 류사오치는 당적(黨籍)을 박탈당하고 '중국의 흐루시초프'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리고 1969년 4월 헌법상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군부의 실력자인 린뱌오[林彪]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1년 가을에 린뱌오도 실각하고 중국 당국은 '모반자이며 매국노의 괴수'인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도망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1974년 류사오치의 사망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홍콩에 있는 중국계 신문은 1974년 10월 31일자 기사에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의 사망일시나 장소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가 1980년 5월 〈베이징 리뷰 Beijing Review〉에서 비로소 그가 1969년 11월 12일에 허난성 카이펑에서 죽었다고 보도되었다.

실각 이유에 대한 추정

그의 실각(린뱌오의 사망으로까지 이어지는 사건들)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몇 년 동안 류사오치·덩샤오핑·린뱌오의 이름이 연명(連名)되었고, 이들 세사람은 당기관지에서 사회주의 개조에 반대하고 공산주의의 이름 아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반혁명적인 '주자파'(走資派)로 비난받았다. 마오쩌둥의 사망 후,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의 아내인 장칭[江靑] 등 소위 '4인방'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곧 실패했다. 당 서열이 비교적 낮은 화궈펑[華國鋒]이 당 지도권을 장악하고, 덩샤오핑은 복권되었다. 그뒤 1980년 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1전대회 5중전회에서 류사오치를 완전히 복권시키기로 결정되었고, 문화대혁명 이후 그에게 붙어다녔던 '반도(叛徒)·내간(內奸)·공적(公賊)'이라는 호칭이 모두 없어지고, 대신에 '위대한 공산주의자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칭호가 붙었다.

반면 린뱌오는 4인방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어 '증거를 날조해서' 류사오치를 '정치적 음모와 신체적 박해'에 처하게 했고, 또 류사오치의 동료라는 이유로 기타 지도자들을 실각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류사오치의 4명의 전처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5번째 처인 왕광메이[王光美]는 '부르주아적' 생활태도를 가졌다고 해서 문화혁명 기간중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류사오치의 슬하에 적어도 8명의 자녀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