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루소

테오도르 루소

다른 표기 언어 (Pierre-Étienne-)Théodore Rousseau
요약 테이블
출생 1812년 4월 15일, 프랑스 파리
사망 1867년 12월 22일, 바르비종
국적 프랑스

요약 바르비종파의 지도자였던 19세기 프랑스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자작나무 아래의 저녁>과 <봄의 풍경>.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다른 사람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공부했으며,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가와 존 컨스터블 같은 영국 화가의 작품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했다. 초기 그의 풍경화는 낭만파 화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1843년 바르비종에 정착하여 프랑수아 밀레, 쥘 뒤프레 등의 풍경화가와 함께 작업하면서 바르비종파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1848년 혁명 이후 그의 풍경화도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14세 때부터 친척인 포 드 생마르탱의 지도를 받는 한편, 혼자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베끼는 방법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1820년대에 들어서는 자연을 직접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의 스승은 신고전주의 전통에 속해 있었지만, 루소는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가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리처드 파크스 보닝턴이나 존 컨스터블 같은 영국 화가들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자신의 화풍을 계발했다.

루소 (Théodore Rousseau)
루소 (Théodore Rousseau)

그의 초기 풍경화는 자연을 거칠고 난폭한 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의 저명한 낭만파 화가와 작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831년부터 루소는 프랑스 살롱전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36년 심사위원들은 〈소떼의 급습 Descent of the Cattle〉(1834경, 네덜란드 헤이그 H. W. 메스다크 미술관 소장)을 낙선시켰고, 그후 7년 동안 그의 출품작은 모두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살롱의 가혹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다.

루소는 1833년 처음으로 퐁텐블로 지역을 찾아갔고, 10년 뒤에는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에 정착하여 장 프랑수아 밀레, 쥘 뒤프레, N. V. 디아스 및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같은 풍경화가들과 함께 일했다. 그들은 작품상 추구하는 바가 비슷했기 때문에, 일괄하여 바르비종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루소는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의 영향을 보여주는 〈자작나무 아래의 저녁 Under the Birches Evening〉(1842~44,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 톨레도 미술관 소장) 같은 평화로운 전원풍경을 그렸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살롱은 좀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었고, 루소는 마침내 프랑스의 주요 풍경화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1855년 국제박람회에서 전시되었으며, 1867년 박람회의 미술부문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어부(The Fisherman)
어부(The Fishe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