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자 샤 팔라비

레자 샤 팔라비

다른 표기 언어 Reza Shah Pahlavi 동의어 레자 칸, Reza Khan
요약 테이블
출생 1878년 3월 16일, 이란 마잔다란 알라슈트
사망 1944년 7월 26일, 요한네스버그
국적 이란

요약 서구 열강의 각축 속에서 이란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1928년 그는 열강들과의 불공평한 협정·조약들을 무효화하고 모든 특혜조치들을 폐지했다. 이란 횡단철도를 건설하고 주요도시들을 연결하는 지선을 만들었으며, 여성을 해방시켜 얼굴을 가리던 베일을 벗도록 했다. 그때까지 실질적으로 외국의 손에 들어 있던 국가의 재정과 통신을 장악했다. 그는 도로·학교·병원을 건설했고 최초로 대학교를 창설했다. 그의 정책은 국가의 민주화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했다. 앞선 통치자들의 수세기에 걸친 실정과 1914~19년 열강들이 이 땅에서 벌인 전쟁의 참화로 인해, 1921년 이란은 지치고 황폐해져서 거의 붕괴될 지경에 처해 있었다. 레자 칸은 팔레반이라는 씨족의 족장 가문출신으로 군대에 들어가, 비상하게 강한 의지, 뛰어난 재주 및 지도력을 나타내어 상급자들에게 크게 주목받았다. 그는 1921년 2월 21일 1,200명을 이끌고 테헤란을 점령했다. 레자 칸은 군을 장악하고 몇 주 뒤에는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국방장관으로서 그는 줄곧 여러 총리들의 배후 실세로 존재하다가, 1923년 그 자신이 총리가 되었다. 1925년 마질레스는 부재중인 국왕을 폐위했으며 제헌의회는 레자 칸을 샤로 선출하고 새로운 팔라비 왕조에 통치권을 부여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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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활동
  3. 1921년의 쿠데타
  4. 샤로서의 정책

개요

이란의 왕(Shah)이 되었고(1925~41), 국가 쇄신사업에 착수했다.

초기활동

레자 칸은 팔레반이라는 씨족의 족장 가문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바스 알리 칸 대령이 죽자, 레자의 어머니는 그를 테헤란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그는 결국 이란 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러시아인 교관 밑에서 복무했다. 키가 크고 신체 건장한 이 젊은 병사는 처음부터 비상하게 강한 의지, 뛰어난 재주 및 지도력을 나타내어 상급자들에게 크게 주목받았다.

1921년의 쿠데타

앞선 통치자들의 수세기에 걸친 실정과 1914~19년 열강들이 이 땅에서 벌인 전쟁의 참화로 인해, 1921년 이란은 지치고 황폐해져서 거의 붕괴될 지경에 처해 있었다.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아흐마드 샤는 어리고 무능했으며, 내각은 약하고 부패해 있었다.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이란을 지배해온 외세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특히 영국러시아는 상업적·전략적으로 이 나라에 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자 칸은 혼란상태를 종식시키고 효과적이며 잘 훈련된 무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이양받아 강력한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그는 몇몇 젊고 진보적인 요인들과 접촉해 1921년 2월 21일 1,200명을 이끌고 테헤란을 점령했다. 젊은 저널리스트인 사이드 지아 옷딘 타바타바이가 총리가 되었고, 레자 칸은 군을 장악하고 몇 주 뒤에는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레자 칸은 이란 국가를 쇄신해 발전시키려는 꿈을 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레자 칸을 단순한 연대장교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왕이 내린 거창한 칭호와 명예의 보검에 만족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진실하지만 경험이 없는 이상주의자들과 외국세력에 영향을 받는 기회주의자들이 섞여 있는 집단에게 나라를 다스리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는 근엄한 인상에 말수가 적어 결코 그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정적에 대해서는 강력한 정치재능을 발휘해서 그들을 분열시키거나 약화시켰다. 그는 또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군대를 완전히 통제하지 않으면 안되며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약간의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으므로 그 수입으로 군대를 만들고, 그 군대를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데 사용해서 결국 전국을 완전히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국방장관으로서 그는 줄곧 여러 총리들의 배후 실세로 존재하다가, 1923년 그 자신이 총리가 되었다.

국왕 아흐마드 샤는 병들어 유럽에서 오랫동안 치료받고 있었다. 레자 칸과 마질레스(이란 국회) 의장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흐마드 샤는 이란으로 귀국하기를 거절했다.

레자 칸은 공화국을 선포할 것을 고려했지만, 국민들 대다수가 그 생각에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1925년 마질레스는 부재중인 국왕을 폐위했으며 제헌의회는 레자 칸을 샤로 선출하고 새로운 팔라비 왕조에 통치권을 부여했다.

샤로서의 정책

1926년 4월 즉위한 뒤, 레자 칸은 총리 때 착수했던 급진적인 개혁들을 계속 추진했다.

그는 국내의 분쟁을 야기시켜왔던 부족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일부는 정착시켜 그 힘을 약화시켰다. 1928년 그는 열강들과의 불공평한 협정·조약들을 무효화하고 모든 특혜조치들을 폐지했다. 그는 이란 횡단철도를 건설하고 주요도시들을 연결하는 지선을 만들기 시작했다(1927~38). 또한 여성을 해방시켜 얼굴을 가리던 베일을 벗도록 했다(1935). 그리고 그때까지 실질적으로 외국의 손에 들어 있던 국가의 재정과 통신을 장악했다.

그는 도로·학교·병원을 건설했고 최초로 대학교를 창설했다(1934). 그의 정책은 국가의 민주화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했다.

그의 대외정책은 주로 소련과 영국을 맞붙게 하여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는데, 1941년 두 나라가 독일과 싸우기 위해 연합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란을 통해 소련군에 군수물자를 수송할 목적으로 1941년 8월 두 연합국은 함께 이 나라를 점령했다.

레자 칸은 왕위에서 물러나 왕위계승권자인 아들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에게 새로운 정세에 맞는 정책을 채택하여 왕국을 지키도록 했다.

그는 캐나다로 가기를 원했으나, 영국 정부는 그를 처음에는 모리셔스로, 나중에는 요한네스버그로 보냈다. 그곳에서 1944년 7월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