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3세

레오 3세

다른 표기 언어 Saint Leo III
요약 테이블
출생 ?, 로마
사망 816. 6. 12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1673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6월 12일. 로마의 교황(795~816 재위).

추기경이었던 795년 12월 26일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후계자로 선출되어 이튿날 축성되었다. 하드리아노 1세가 비잔티움 황제와 샤를마뉴 사이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독립된 교황자리를 지키려 했던 것과는 달리 레오는 교황이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샤를마뉴를 로마인의 아버지로 인정하여 최고의 권위를 내주었다.

799년 4월 로마 행진중 하드리아노 지지자들이 선동한 사람들로부터 피습을 당했다.

이 사람들은 레오가 그릇된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그의 눈과 혀를 잘라 더이상 교황직을 수행할 수 없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레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후원자 샤를마뉴가 있는 파데르보른으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정확히 무엇을 협정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1월에 한 위원단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로마로 돌아왔다. 이 위원단은 사람들이 레오에 대해 불평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또 그를 규탄한 사람들을 체포해 국외로 추방했다.

그러나 로마의 혼란이 계속되자 800년 가을 '크게 흐트러진 교회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샤를마뉴가 로마에 왔다. 같은 해 12월 23일 레오는 샤를마뉴 앞에서 자신을 향한 비난에 대해 정식으로 결백을 증명했다. 이틀 뒤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 1세의 서품식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인 많은 군중들 앞에서 레오는 갑자기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웠다.

이 행동으로 이전에 겪었던 굴욕을 없애고, 교황만이 황제의 관을 수여할 수 있다는 법적 전례를 세웠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법적 절차 없이 혁명적으로 행해진 이 대관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동로마 제국과 나란히 서로마 제국을 건설하고자 한 레오의 의도는 비잔티움 국민들이 샤를마뉴를 왕위찬탈자로 여겼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미리 준비된 듯한 레오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13세기까지 경쟁 관계를 지속하게 한 동·서 분열을 가져왔고, 교황과 서로마 지역을 동맹관계로 맺어 교황의 세계적 권위를 세우는 데 샤를마뉴와 그 후계자들이 이전보다 더욱 깊이 관여하게 했다.

교황과 황제의 사이는 비교적 좋은 편이었지만 샤를마뉴는 제국의 행정과 더불어 교회의 개혁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809년 샤를마뉴의 신학자들이 왔을 때 레오는 니케아 신경에 나타나 있는 필리오케(Filioque) 조항(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교리)이 교리상 올바르다고 확증했다. 그러나 동방교회들은 이 조항을 항상 거부해왔었기 때문에 레오는 그리스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공적인 예배에서는 이 신조를 노래하지 않도록 촉구했다.

814년 샤를마뉴가 죽자 레오에 대한 로마 귀족들의 증오가 다시 일어났다. 레오는 몇몇 음모자들을 사형시키고, 아버지 샤를마뉴를 계승한 루이에게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는 글을 보낸 후 얼마 안 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