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세스 3세

람세스 3세

다른 표기 언어 Ramses III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BC 1156, 이집트 테베
국적 이집트

요약 람세스 3세는 3차례의 큰 전쟁에서 외국의 침입을 막아내어 재위 동안 대체로 국가의 평온을 유지했으나 재위 말년에는 내부 혼란과 쿠데타를 겪었다.
제20왕조를 세운 세트나크트(BC 1190~1187 재위)의 아들이다. 재위 5년째 되던 해에 나일 강 삼각주 서부지역을 침략한 리비아 부족들을 물리쳤다. 그 후 2차례에 걸쳐 해양민족 연합군과 리비아 부족들의 재침입이 있었으나 막아냈다. 3번째 전쟁을 치른 뒤 이집트 사회를 직업에 따라 계급화했으며 테베 서쪽 마디나트 하부에 자신의 거대한 장제전, 궁전, 복합도시 등을 세웠다. 무역과 산업을 권장하여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해안지방 푼트에 해양 무역선을 보냈고 시나이의 구리 광산과 이집트 남쪽 지방에 있는 누비아의 금광을 개발했다. 람세스는 재위 32년 테베에서 죽었고 왕자 람세스 4세가 왕위를 이었다.

람세스 3세(Ramses III)
람세스 3세(Ramses III)

3차례의 큰 전쟁에서 외국의 침입을 막아내어 재위 동안 대체로 국가의 평온을 유지했으나 재위 말년에는 내부 혼란과 쿠데타를 겪었다. 제20왕조를 세운 세트나크트(BC 1190~1187 재위)의 아들로 그가 왕위에 올랐던 시기는 제19왕조 말기에 이집트를 혼란에 빠뜨렸던 내란의 여파가 회복되고 있을 때였다. 재위 5년째 되던 해에 리비아 부족들이 연합해 자신들의 추장 계승에 간섭했다는 구실로 나일 강 삼각주 서쪽 지역을 침략해 들어왔다. 그전에도 리비아인들은 이집트 영토를 침범해와 이집트 제19왕조와 제20왕조 내내 골칫거리였는데 이들은 결국 삼각주 서부지역 전투에서 참패했다.

2년간 평화가 지속되다가 더욱 위험한 적인 해양민족 연합군이 바다와 육지를 통해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들은 소아시아와 지중해 섬 출신 이주민들의 연합군으로서 소아시아의 강대국인 히타이트 제국을 무찌르고 시리아를 황폐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람세스의 육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이 침략자들의 전진을 막아냈고 삼각주를 흐르는 복잡한 수로망으로 적함을 유인해 가두었다. 이집트는 이 북쪽 침략자들을 막아냈으나 이들 가운데 두 종족이 가자와 카멀 산 사이에 있는 팔레스타인 해변에 정착함으로써 이집트는 더이상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뒤 2년 남짓 평화가 지속되었으나 람세스 재위 11년에 리비아 부족들이 새로 연합해 삼각주 서쪽 지역을 침입했고 람세스는 리비아군 지휘관을 사로잡음으로써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마지막 전쟁을 치른 뒤 람세스는 이집트 사회를 직업에 따라 계급화했으며 테베 서쪽 마디나트 하부에 자신의 거대한 장제전, 궁전, 복합도시 등을 세웠다. 또한 테베에 있는 신전 단지인 카르나크에 신전을 몇 개 더 지었다. 무역과 산업을 권장한 람세스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해안지방 푼트에 해양 무역선을 보냈고 시나이의 구리 광산과 이집트 남쪽 지방에 있는 누비아의 금광을 개발했다.

통치기간 중반기가 순조로웠던 반면 재위 말기에 람세스는 통치상의 어려움과 반역 음모에 시달렸다. 재위 28년경에는 하(下)이집트의 고위관리가 부정사건으로 쫓겨났다. 또 1년 뒤에는 테베에서 왕실 묘지를 짓던 일꾼들이 매달 배급되는 식량이 늦어지는 데 항의해 파업을 일으켰다. 중단된 작업은 이집트 전체의 책임을 맡고 있던 상이집트 고위관리가 중재해 겨우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람세스 치세가 끝날 무렵 후궁 1명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음모자들이 모두 재판받은 것을 보면 이 음모는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간 것 같다. 그러나 람세스는 이 음모에 의해, 아니면 음모가 있은 직후에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서상으로는 음모가 있었던 해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왕의 미라에도 아무런 상처가 없다. 람세스는 재위 32년 테베에서 죽었고 왕자 람세스 4세가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