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슈

드리슈

다른 표기 언어 Hans Adolf Eduard Drie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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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7. 10. 28, 프로이센 라인 바트크로이츠나흐
사망 1941. 4. 16, 라이프치히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실험발생학자·철학자.

생명은 물리적 또는 화학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생기론(生氣論)의 마지막 주창자이다.

함부르크의 부유한 금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마르틴 루터의 친구가 인문주의 정신에 따라 설립한 유명한 김나지움에서 초기교육을 받았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집에서 기르던 신기한 동물들은 그에게 동물학에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다. 당시 독일의 관습에 따라 함부르크·프라이부르크·예나에 있는 여러 대학에 다니면서 동물학과 당시 동물학자에게는 낯선 연구과목인 화학·물리학을 공부했다. 예나에서 진화론의 특수분과인 계통발생학에 주로 관심을 가진 에른스트 하인리히 헤켈 밑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그러나 드리슈 자신의 연구는 방향이 달랐다.

1887년에 받은 박사학위 논문은 군집 히드로층(蟲)의 성장을 제어하는 요인들에 대해 다루었다.

이후 10년 동안 널리 여행했고, 해양생물의 알을 가지고 주로 나폴리에 있는 국제동물학회에서 실험을 했다. 1891년 세포분열을 하고 있는 성게알에서 최초로 형성된 두 세포를 분리해냈고, 이 두 세포는 각각 온전한 유생(幼生)을 형성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888년 빌헬름 가 개구리알을 가지고 비슷한 실험을 했으나 최초의 두 세포는 각각 배(胚)의 반쪽만 형성한다는 아주 다른 결과가 나왔었다.

루는 생물체의 각 부분은 두 세포 단계에서 결정된다고 결론지었으나, 드리슈는 세포의 운명이 두 세포 단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생물체 속에서 그 세포가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드리슈는 그해 처음으로 완전히 이론적인 논문을 발표했고 1929년에는 생물학적 자료를 생기론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실험결과는 실험발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밖에도 드리슈는 발생학에 유명하지는 않으나 중요한 공헌을 했다. 2개의 배를 결합하여 커다란 유생을 만들었고, 세포분열하는 알을 압축하여 비정상적인 핵분포를 생기게 함으로써 핵은 모두 동등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실험은 현대 유전학의 중요한 선구가 되었다.

그는 세포질이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했고 핵은 효소를 통해 세포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했다. 1896년 성게 유생의 골격을 형성하는 세포의 위치를 바꾸어놓기 위해 유생을 흔들어놓은 결과 잘못 놓인 세포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관찰했다(정형성게류). 이 실험은 배의 두 부분이 상호작용함으로써 분화가 일어난다는 배발생 유도현상에 대한 최초의 증명이었다.

그는 1894년 이 증명의 이론적 측면을 고찰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1895년경 드리슈는 생기론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기계론의 용어로는 자신의 세포분리 실험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기론자 입장으로 몰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2개의 동일한 기계로 분화할 수 있는 기계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물체의 성장을 조절할 수 있는 생기적 인자(因子)를 나타내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용어인 엔텔레케이아를 사용했다. 비록 이러한 인자를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 인자의 작용은 자신이 성장에 중요하다고 인식한 효소의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1899년 드리슈는 마르가레테 라이페르샤이트와 결혼했고 2명의 자녀 쿠르트와 잉게보르크를 두었는데 이들은 음악가가 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 정착하면서 1909년까지 발생학 실험을 계속했고 마침내 당시 독일에서 자연철학 분야의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자격을 획득했다. 그는 자연과학 교수직을 얻어 1912년부터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교수로 훌륭히 일했으며, 1919년 쾰른으로 1921년에는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철학자로서 그는 이마누엘 칸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전공했다. 초심리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그의 생기론적 경향 때문이었던 듯하다.

드리슈의 연구는 실험발생학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배발생 유도, 효소작용, 핵과 세포질의 상호작용 등에 관한 실험적·이론적 작업(지금은 잊혀졌지만 당시에는 널리 퍼져 있었음)은 기본틀 면에서 덜 생기론적이지만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연구활동을 야기했다. 1935년 나치에 의해 강제 은퇴당했으나 죽을 때까지 저술활동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