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제

동치제

다른 표기 언어 T'ungchih , 同治帝 동의어 청나라 제10대 황제,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의황제, 毅皇帝
요약 테이블
출생 1856. 4. 27, 베이징
사망 1875. 1. 12, 베이징
국적 청(淸), 중국

요약 동치제는 어머니 서태후의 섭정으로 실제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재위기간 동안 매우 혼란스러웠던 정국에 잠시 안정이 찾아왔으며, 이를 동치중흥이라 부른다.
1861년 청 정부는 당시 중국 남부를 위협한 태평천국운동을 수습하고 염군의 난을 진압했다. 황실재정은 복구되었고, 인재들을 관직에 새로이 등용했으며 농민에게 씨앗과 농기구를 나누어주고 토지개간을 장려해 농업생산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또한 외교문제를 다루기 위해 총리아문을 새로이 설치해 서양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동치제는 1873년에 친정을 시작해 처음으로 외국사절이 황제를 알현할 때 개두의식을 요구하지 않았고, 톈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맺어 서양 세력과의 긴장을 완화시켰으나, 계속해서 서태후의 간섭을 받았다.

동치제(同治帝)
동치제(同治帝)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8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재순,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의제.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던 청은 동치제가 제위에 있을 때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이를 일컬어 동치중흥이라 한다. 그는 6세에 즉위해 어머니 서태후(西太后 : 1835~1908)가 중심이 된 3인 섭정체제에서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동치중흥은 한(漢 : BC 206~AD 220)과 당(唐 : 618~907) 중엽에 있었던 위대한 유신들을 본떠서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동치 원년(1861)에 청 정부는 당시 중국 남부를 위협하던 태평천국운동(1850~64)을 마침내 수습하고 중국 북부에서 일어났던 염군의 난(1853~68)을 진압했다. 황실재정이 복구되었으며 훌륭한 인재들을 관직에 새로이 등용했다. 오랫동안 반군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 다시 과거시험을 실시했다. 또 농민에게 씨앗과 농기구를 나누어주고 토지개간을 장려해 농업생산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여전히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것만이 관리로 출세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외국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피상적인 성공에 그쳤지만 서양무기제조계획이 실시되었다. 외교문제를 다루기 위해 총리아문을 새로이 설치했으며 서양에 대해 알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7세가 되던 1873년에 친정을 시작한 동치제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6개국의 대표들에게 자신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동치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사절이 황제를 알현할 때 개두의식(간청의 표시로 이마를 3번 바닥에 대고 절하는 의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톈진 조약[天津條約 : 1858]과 베이징 조약[北京條約 : 1860]을 맺어 서양 세력들과의 긴장을 완화시키기도 했으나 병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했던 동치제는 계속해서 서태후의 간섭을 받았다. 그는 친정을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지나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