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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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발표시기 1896년 4월 7일(창간), 1899년 12월 4일(폐간)

요약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에 폐간된 최초의 민간신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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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간동기
  2. 체재와 발행
  3. 내용
  4. 평가
독립신문
독립신문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3년 10월에 창간된 〈한성순보 漢城旬報〉였으나, 정부기구인 박문국에서 발행했으므로 민간인이 창간하여 구독료와 광고료 수입으로 신문을 운영한 것은 〈독립신문〉이 최초였다.

창간동기

이 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로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국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친일내각이 성립되면서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망명객들에게 사면령이 내려져 서재필에게도 귀국의 길이 열렸다.

그는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여 월봉 300원을 받는 조건으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계약기간은 10년이었다. 그러나 중추원 고문으로서의 일은 거의 없었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은 〈독립신문〉의 발행, 독립협회의 창립과 운영, 독립문건립, 배재학당에서의 강의 등이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동기는 대개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을 계몽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갑신정변 때와는 달리 개화사상이 어느 정도 보급되어 있었으나 국민들은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그래서 신문을 발행하여 국민의 정신을 깨우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서재필이 귀국 직후 접촉한 여러 사람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여 생활을 보장하는 한편 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신문사 설립자금으로 3,000원과 개인 생계와 가옥임대비 명목으로 1,400원을 별도로 지급하여 〈독립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경비로 모두 4,400원을 지급했다. 서재필에게 자금을 지원하도록 주선한 것은 내부대신 유길준이었는데 그는 신문을 개화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인식했던 사람이다. 또한 정부가 자금을 댄 이유는 신문을 발간하여 국민을 계몽하겠다는 목적과 함께 일본인들이 발행하고 있던 〈한성신보 漢城新報〉에 대항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측은 이 신문이 창간되기 1년 전인 1895년 2월부터 외무성의 보조금을 받아 서울에서 〈한성신보〉를 발행했는데, 이 신문을 통해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고 조선황실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어서 정부가 일본측에 항의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정부는 〈독립신문〉의 창간자금을 전액 지원했을 뿐 아니라 신문 우송요금을 할인하고 취재활동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특혜를 주었다.

체재와 발행

〈독립신문〉은 창간 당시에는 격일간으로 주 3회(화·목·토요일) 발행되었다. 체재는 가로 22㎝, 세로 33㎝ 판형에 전체 4면으로 이루어졌는데, 1면 머리에는 논설을 싣고 이어서 관보·잡보·외국통신을 2면과 3면의 일부에까지 실었으며, 3면에는 대부분 광고를 실었다. 광고 가운데 1/3 정도는 영문이었는데 이는 이 신문의 독자 가운데 외국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글을 전용하고 띄어쓰기를 단행한 것은 빈부를 막론하고 국민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편리하고 우수한 한글을 널리 쓰도록 하자는 목적에서였다. 이후에 창간된 대한제국 말기의 여러 민간신문들이 한글을 전용한 것도 이 신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4면은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라는 제호의 영문판이었다. 영문판에도 논설을 비롯하여 국내 관보(official gazette), 외신(latest relegrams), 국내외 소식(digest of domestic and foreign news), 독자투고(communications), 외국언론 기사요약(exchanges) 등을 실었다. 창간 당시에는 이처럼 한글판과 영문판이 붙어 있었으나 창간 이듬해인 1897년 1월 1일부터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2개의 신문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영문판은 당시의 한국사정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를 알 수 있는 정확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창간된 지 2년 4개월이 지난 1898년 7월 26일자 논설에서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는 4가지 신문의 발행부수가 통틀어 2,500부라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이 가운데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는 2,000여 부 미만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적은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신문이 창간된 다음해에 발행된 영어 잡지 〈The Korean Repository〉에 따르면 어떤 마을에서는 〈독립신문〉 1부를 가지고 적어도 85명이 돌려가며 읽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독자들은 당시의 정치와 사회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료들과 지식인, 그리고 활동적인 개화파들이었다. 따라서 이 신문의 영향력은 단순한 발행부수로서가 아니라 독자들의 사회적 비중이 높았다는 사실을 토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신문은 처음에는 격일로 발행되다가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발행되었다. 이는 배재학당의 학생회가 그해 4월 9일에 창간한 〈매일신문〉이 일간으로 발행되고 있었던 데에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문판은 그대로 격일간으로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의 창간부터 폐간까지 43개월 동안의 연도별 간행 호수는 다음과 같다.

연도 한글판(호) 영문판(호)
1896 116 116
1897 154 154
1898 228 151
1899 278 21
776 442
독립신문의 체재와 발행

내용

이 신문은 국민의 권리를 수호하고 관리들의 비행을 폭로하며 억눌린 사람들의 처지를 위정자들에게 호소했다.

또 국민들이 부지런하고 문명화된 생활습관을 본받아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서는 4서3경(四書三經)이 아니라 실용적인 학문을 배워야 하며 행정의 개혁과 더불어 국민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신문이 고위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규탄하여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의 여론을 선도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측과 수구파들은 서재필은 추방하려는 일을 꾸몄다. 그래서 1897년 12월 13일 주한미국공사 A. N. 알렌에게 조회하여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할 것을 통고했다.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하겠다는 것은 그의 활동을 제한하고 조선을 떠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서재필은 해임통고에 대해 정부와 1896년 1월에 체결한 10년 기간 가운데 지금까지 받은 월봉 외에 남은 기간의 급료와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을 일시에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서재필과 계약한 10년 기간 가운데 남은 7년 10개월분의 봉급은 2만 8,200원이었는데, 정부는 이 가운데 〈독립신문〉을 창간할 때 지급했던 4,400원을 공제하고 2만 4,400원을 주어 1898년 5월 14일 그를 미국으로 떠나게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신문의 소유권을 그대로 가진 채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윤치호(尹致昊)와 미국 선교사 H. G. 아펜젤러에게 이 신문의 운영을 맡겼다. 그러나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후 윤치호가 정계에서 떠나게 되자 아펜젤러가 주필직을 맡았다가 1899년 6월 1일부터 영국인 H. 엠벌리가 사장에 취임했다.

그런데 정부는 1899년 7월 14일 〈독립신문〉의 사옥이 정부 소유의 건물이기 때문에 이를 반환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정부와 미국에 있는 서재필 사이의 교섭을 주선한 끝에 1899년 12월 4일 정부가 서재필에게 4,000원을 지급하여 이 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수함으로써 사실상 이 신문은 폐간되었다. 이에 앞서 영문판은 1898년 12월 29일자까지 주 3회 매호 4면으로 발행되었으나 윤치호가 신문사를 떠나자 중단되었다가, 1899년 6월 9일 속간되어 주간으로 발행되다가 9월 14일자로 한글판이 폐간되기 전에 사라졌다.

평가

〈독립신문〉의 비판정신은 한국언론의 전통으로 계승되었고, 과감한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단행하여 국어운동사에도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이 신문에 영향을 받아 1896년부터 〈매일신문〉·〈제국신문〉·〈황성신문〉 등의 여러 민간신문들이 창간되어 국민계몽과 개화, 그리고 구국운동의 선도자 역할을 맡았다.

한국에서 개화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880년대부터였는데 이때 초기 개화운동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한성순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운동은 몇 사람의 선각자들이 국민들에게 개화사상을 불어넣어 주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0년대에는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대중화운동으로 발전되어갔다. 그런데 1890년대의 개화운동이 1880년대와 다른 차원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독립신문〉이었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개화운동에 있어 점화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이 신문에 실린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 한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알게 되었고 투철한 독립정신,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