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오 4세

니콜라오 4세

다른 표기 언어 Nicolaus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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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227. 9. 30, 교황령 아스콜리피체노 근처
사망 1292. 4. 4,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프란치스코 수도회 출신 최초의 교황(1288~92 재위).
(영). Nicholas Ⅳ. 본명은Girolamo Masci.

니콜라오 4세(Nicolaus IV)
니콜라오 4세(Nicolaus IV)

청년시절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여 달마치야관구장이 되었다. 12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되어 그리스 교회와 잠시 재결합을 이루는 데 영향력을 미쳤다. 1274~79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 사무장을 지냈고, 1281년에 교황 마르티노 4세에 의해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다.

1288년 2월 22일 교황 호노리오 4세의 후임으로 선출되어 거의 11개월간 공석이던 교황직에 올랐다.

니콜라오 4세는 이탈리아의 유력한 가문 콜론나가(家)를 매우 신뢰해 그 가문 출신 추기경들의 수효를 늘렸다. 1289년의 교서에서는 교회 수입의 절반과 행정의 일정 몫을 추기경회에 하사하게 함으로써 교회와 교황령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추기경회의 역할을 강화시켰다. 1290년에는 사도파, 즉 절제와 청빈을 문자 그대로 지킴으로써 초대 교회의 생활과 규율을 재건하려고 하던 여러 그리스도교 소종파를 금지하는 새로운 교서를 공포했다.

니콜라오 4세는 전임 교황들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호노리오 4세와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가(독일 왕 루돌프 1세)와 앙주가(시칠리아 왕 샤를 1세)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시칠리아의 대군주로서 아라곤 왕가에 압력을 가해 시칠리아를 앙주가에 돌려주도록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291년에는 프랑스와 아라곤 왕국 간의 분쟁을 종식시켰다.

니콜라오는 십자군을 다시 일으키지 못했으며, 그 결과 십자군이 세운 마지막 그리스도교 국가인 팔레스타인 아크레 요새가 1291년에 이집트의 술탄 맘루크에게 함락되었다. 그는 서양 여러 나라와 몽골족의 힘을 합하여 이슬람교도들에 대항하고 싶어했는데, 마침 페르시아의 일칸 아르군이 니콜라오와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 영국의 왕 에드워드 1세에게 합동작전을 긴급 요청해오자 희망을 갖게 되었다. 비록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니콜라오는 프란치스코회의 유명한 선교사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를 쿠빌라이 황제 조정에 보냈고, 이로 인해 중국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발칸 반도와 근동 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프란치스코회 출신이었다. 그는 로마의 건축과 미술에도 많은 공헌을 했는데, 특히 라테란에 있는 산조반니 대성당과 마조레에 있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을 복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