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해방령

노예해방령

다른 표기 언어 Emancipation Proclamation , 奴隸解放令

요약 1863년 1월 1일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연방정부에 대항하던 남부연합 정부의 노예해방을 선포한 포고령.

노예해방령(Emancipation Proclamation)
노예해방령(Emancipation Proclamation)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부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 주(州)의 자격을 얻어 연방으로 들어올 서부 준주(準州)들에서 노예제 확장을 막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남부의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고 이어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북부인들은 남부에 노예제를 계속 허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이상 유익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이렇게 해서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던 노예해방은 실행가능하며 절박한 일로 급속히 바뀌었다.

링컨은 연방유지가 가장 중요하며, 노예제를 유지하거나 없애거나, 또는 일부 지역에서만 없애는 것 등은 그 다음 문제라고 이미 밝혔다. 앤티탐 전투(1862. 9. 17) 직후 그는 남부연합의 주들이 그해가 가기 전에 연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의 노예를 자유민으로 선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어떤 주도 연방에 돌아오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 1일 포고령을 발표했다.

사실 이 일은 링컨의 자격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미국 육·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이 관할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노예해방령은 관할영역 밖의 영토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해방령이 실제로 구속력을 가진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어왔다. 따라서 이 포고령은 군대를 통솔하기 위한 정책발표, 또는 앞으로 관할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효력을 가질 해방선언으로 볼 수밖에 없었으며, 사실상 결과도 그러했다.

노예해방령은 국제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북부가 세계적인 면화공급원인 남부를 봉쇄하는 것은 유럽으로서는 큰 재난이었기 때문에 남부연합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전쟁이 노예제에 반대하는 십자군전쟁으로 바뀌게 되자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은 불가능해졌다. 노예해방령은 남북전쟁을 인간해방을 위한 십자군 전쟁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이는 흑인병사를 모집하는 신호탄이 됨으로써 매우 실질적인 결과를 낳았다. 상당수의 흑인들이 참전 권유에 호응함으로써 남은 전쟁 기간 동안 18만 명에 가까운 흑인들이 북군의 푸른색 군복을 입었다. 1863년 8월 26일 링컨은 제임스 C. 콩클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노예해방정책과 흑인병사의 활용은 반란세력에게 어떤 것보다도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고 쓰고 있다.

전쟁이 끝나기 2개월 전(1865. 2) 링컨은 초상화가인 프랜시스 B. 카펜터에게 노예해방령은 "나의 통치의 중심이 되는 법령이며 19세기 최대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링컨과 미국 국민에게는 노예해방령이 인간 속박에 대한 철퇴였음이 분명했다. 노예해방령은 1865년 12월 수정헌법 13조가 비준됨으로써 공식 승인되었고, 이후 미국의 건국이념인 자유와 평등개념에 생명을 불어넣어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