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더글러스

다른 표기 언어 Frederick Douglass 동의어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 워싱턴 베일리, 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
요약 테이블
출생 1817. 2. 7, 미국 메릴랜드 터커호
사망 1895. 2. 20, 워싱턴 D. C.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노예폐지운동가.
본명은 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

도망 노예 출신으로 연설 솜씨와 문필력이 뛰어나 미국 노예폐지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미국 정부 고위직에 임명된 최초의 흑인 시민이며, 19세기 인권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노예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어머니와도 아주 어려서 생이별한 뒤 메릴랜드 주의 농장에서 할머니와 살았다. 8세 되던 해에 볼티모어로 보내져서 휴 올드 집안의 하인으로 지냈는데, 올드 부인은 주(州) 법을 어겨가면서 그에게 읽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올드 씨가 배우는 것은 노예 신분에 걸맞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의 도움으로 몰래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이 죽자 16세에 원래의 농장으로 되돌아가 농장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고, 얼마 후 다시 볼티모어에서 뱃사람이 되었다. 1833년 다른 3명의 노예와 함께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각되었다. 5년 뒤에 뉴욕 시로, 그리고 매사추세츠 주의 뉴베드퍼드로 탈출, 그곳에서 3년 동안 노동자 생활을 했다. 이때 노예 사냥꾼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더글러스로 성을 바꿨다.

1841년 매사추세츠 주 낸터킷에서 열린 노예제 반대 집회에서 더글러스는 노예로서의 체험과 느낌을 말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때 한 연설이 매우 통렬하고 감동적이어서 그는 매사추세츠 노예제반대협회의 운동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그때부터 줄곧 야유와 조롱, 모욕과 폭력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노예폐지운동에 헌신했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노예였을 리가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이에 대한 반박으로 자서전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여 1845년에 쓴 자서전이 1882년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생애와 시대 Life and Times of Frederick Douglass〉라는 제호로 개정·보완되어 다시 출판되었다.

이 자서전은 미국 문학의 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노예의 입장에서 노예제를 묘사한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작품에서 전 주인의 이름과 거처를 밝혔기 때문에 다시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2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로 강연 여행을 떠났다. 해외 여행에서는 새로 사귄 많은 친구들을 노예폐지운동에 참여시켜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에 인도주의적 개혁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 여행에서 많은 기금을 모아 돌아와서 자유를 되찾았고, 1847~60년에는 직접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노예제 반대 신문 〈노스 스타 North Star〉(후에 〈프레더릭 더글러스 신문〉으로 개칭)을 창간했다.

노예폐지운동의 지도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독자적인 흑인 신문의 필요성에 대해 반대했고 도덕적 권고를 정치적 행동으로 보완하려는 더글러스의 입장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했다. 그리하여 1851년 이후로 더글러스는 제임스 G. 버니가 지도하는 운동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폭력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특히 1859년 10월 버지니아 주 하퍼스페리 무력기습에 반대했다.

남북전쟁 기간(1861~65)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자문위원이 되었는데, 예전의 노예들을 북군으로 무장시켜 노예제에 반대해서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전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부의 주들을 미합중국으로 재통합하던 기간(1865~77)에는 해방 노예의 완전한 시민권 획득을 위해 투쟁했으며 여성의 권익 운동을 강력히 지원했다. 산토도밍고 위원회의 간사보(1871)로 일하기도 했으며, 재통합기 이후에는 워싱턴 D. C.에서 연방재판소 집행관(1877~81)과 공훈기록관(1881~86)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마지막에는 아이티 주재 미국 공사 겸 총영사(1889~91)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