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자강회

대한자강회

다른 표기 언어 大韓自强會

요약 1906년 3월 발족하였고 윤치호가 초대 회장이었다. 교육 개발과 식산 흥업·외세 배격을 표방하고 〈대한자강회월보〉를 간행하고 의무 교육 실시, 악폐 금지, 단발 시행 및 유색 복장 착용 등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순종 즉위 반대 운동이 일어나자 통감부가 대한 자강회를 강제 해산시키자 대한 협회로 바뀌었다.

장지연·윤효정·심의성·임진수·김상범 등이 발기인이 되어 헌정연구회를 확대하여 1906년 3월 발족했다.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윤치호가 초대회장이었다. 보호국체제 아래에서 계몽운동은 정치운동의 성격보다는 사회문화운동·교육활동·산업진흥운동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대한자강회는 바로 이러한 대표적 단체이다.

교육개발과 식산흥업(殖産興業)·외세배격을 표방하고 전국에 25개의 지회를 조직했으며 〈대한자강회월보〉를 간행하는 한편, 정기적인 연설회를 열면서 그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의무교육 실시, 악폐의 금지, 단발시행 및 유색(有色)복장의 착용 등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순종 즉위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통감부는 그해 8월 27일부로 공포된 보안법 제2조의 규정을 적용시켜 이완용 내각의 내무대신 송병준으로 하여금 8월 21일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이 회는 11월 김가진을 회장으로 하는 대한협회로 바뀌었다. 한편 대한자강회의 활동에는 고문으로 있던 일본인 오가키[大垣丈夫]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러한 점이 배일성(排日性)을 약화시키는 큰 요인이 되었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회는 당시의 제일 급선무가 일본이 의병을 토벌하는 일이라 할 정도였으며, 이 때문에 의병들이 대한협회의 지회를 공격하였고 지회 총무를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