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다른 표기 언어 大東輿地圖

요약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 김정호가 1861년에 만든 조선의 지도. 목판본이며 축척은 약 16만분의 1이다. <청구도>를 증보·수정하여 제작한 대축척 지도이다. 전국의 남북을 22단, 동서를 19판으로 구분해 떼고 붙일 수 있도록 절첩식으로 만들었다. 크기는 길이 약 7m, 폭 약 3m이다. 목판본은 보물 제1581호로 등록되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필사본은 규장각 외 여러 곳에 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특징
  3. 지도유설
  4. 축척
  5. 산계와 수계
  6. 지도표
  7. 현황
김정호
김정호

개요

대동여지도(19세기 후반)
대동여지도(19세기 후반)

〈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지리학자였던 김정호가 자신이 1834년 제작한 〈청구도(靑邱圖)〉를 27년 후인 1861년에 증보 수정한 대축척 지도이다.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지도첩이다. 근대 이전에 제작된 한반도의 지도 중에서 가장 정밀도가 높다.

특징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우리나라의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구분하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끊어 19판으로 구분했다. 동서방향은 구획된 판을 접어서 연결시켜 1첩으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남북은 동서의 방향을 연결시킨 각첩을 펼쳐서 순서대로 이어 대면 연속된 남북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지도첩의 형식은 넓은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을 지니는 동시에 22층을 펼쳐서 전부 이어 붙이면 우리나라 전도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제1층에는 지도의 제목과 발간 연도 및 발간자를 명시하고, 본도와는 별도로 상세한 서울의 도성도(都城圖)와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를 싣고 있다. 도성도는 〈청구도〉의 도성전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경조오부는 김정호의 1840년대 제작으로 추정되는 목판 〈수선전도(首善全圖)〉와 같은 맥락의 지도이다.

지도유설

지도유설(地圖類說)은 〈대동여지도〉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지도 외에 4면에 걸쳐 실려 있다. 지도유설에는 지도의 기원과 그 중요성을 말하고 중국 진(晋)나라 지도학자인 배수(裴秀)가 말한 지도제작의 6원칙을 소개했다. 지도유설의 끝부분에는 문헌비고를 인용해서 우리나라의 해안에 연해 있는 읍의 거리를 근거로 한 해안선의 거리와 압록강과 두만강의 길이 등을 이수(里數)로 표시하고 있다.

축척

〈대동여지도〉에는 제1층 첫머리에 그려져 있는 지도 방안(方眼)에 매방십리(每方十里)라고 되어 있어서 간접적으로 축척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좌표에 해당하는 이 방안은 지도를 동서로 접은 1면을 남북 12방안, 동서 8방안으로 구분하고 있고, 남북이 120리, 동서는 80리로 되어 있다. 그리고 1면의 실제 길이는 남북이 약 30㎝, 동서가 약 20㎝이다. 그러므로 동서 20㎝가 80리(32㎞)에 해당되는 축척이므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청구도〉와 같이 약 1/160,000이 된다. 〈대동여지도〉를 표구하여 괘도를 만든다면 길이가 약 7m, 폭이 약 3m가 되는 대형지도가 되어 특별한 건물이 아니면 전시할 수 없는 대지도가 된다. 18세기의 대표적인 대축척지도인 정상기(鄭尙驥;1678~1752)의 〈동국지도〉는 약 1/400,000 지도이다. 〈동국지도〉보다 약 100년 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그 축척에 있어서 2.5배, 면적에 있어서 약 6.3배의 지도가 된다.

산계와 수계

〈대동여지도〉는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를 가장 성공적으로 나타낸 지도이다. 일반지도에서는 지형표시에서 개개의 산지나 평지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나 〈대동여지도〉에서는 개개의 산보다 산계 즉 산줄기를 표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산지와 산지가 떨어져 있더라도 그 중간을 연결하는 분수계(分水界)가 있으면 이 두 산지는 연속되는 산줄기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산줄기 사이에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수계를 자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산지를 개별적인 독립된 산으로 보지 않고 어떤 체계를 가진 산줄기로 보려는 시도는 묘도(墓圖)에서 널리 쓰여온 전통이다. 묘도의 대부분은 풍수(風水)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산줄기와 물줄기의 도식적 표현은 묘도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대동여지도〉에서 산계와 수계의 중시, 특히 분수계를 연속되는 산줄기로 표현한 점은 묘도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다. 그러나 묘도에서는 국지적인 좁은 지역에 한정되어 있으나 〈대동여지도〉는 전국적인 규모라는 데 큰 차이가 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산계를 단순한 선으로만 표시한 것이 아니고 선의 넓고 좁음의 형태를 통하여 산맥과 산의 모양·크기 및 분수령과 하천유역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도록 표현한 일종의 '산악투영도법(山岳投影圖法)'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도에서 개개의 산지가 아니고 산맥을 표시하는 전통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이회(李薈)의 〈팔도지도〉,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의 〈동국지도〉(1463), 그리고 18세기 중엽 정상기의 〈동국지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도들은 모두 필사본이고, 또 〈대동여지도〉에 비교하면 소축척지도이다. 김정호는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목판 인쇄를 통해서 새로운 산계의 표시를 시도한 것이다.

지도표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청구도〉에서는 지도 안에 호구·전결·군정과 같은 지지적(地誌的)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나 대동여지도는 지지적인 내용은 따로 제작한 〈대동지지 大東地志〉에 미루고 순수한 지도로 남게 했다. 따라서 기술적인 내용은 가능한 한 부호로 처리했다. 이 부호를 설명한 범례(凡例)를 〈대동여지도〉에서는 지도표(地圖標)라고 부르고 있다. 지도표는 14개 항목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22개로 세분하였다. 〈청구도〉에서도 지도식(地圖式)이라고 하여 지도의 범례가 있기는 했으나 간략한 것이었고, 〈대동여지도〉에서 본격적인 지도의 범례가 채택되었다.

지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축척 지도에 걸맞게 지도의 내용이 매우 자세해졌다. 즉, 각도의 관찰사영을 표기하는 영아(營衙), 부군현(付郡縣)의 읍치(邑治), 성지·역참·창고·목소·봉수·능침·방리·고현·고진보·고산성·도로 등이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성지·진보·역참·목소·봉수 등 군사적인 주요시설을 상세히 표시하고 있는 점은 김정호가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도의 군사적인 중요성을 잘 나타낸 부분이다.

교통로의 표시도 〈청구도〉 보다 훨씬 자세하다. 〈청구도〉에서는 주로 남북방향의 간선도로의 표시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대동여지도〉에서는 그외에 동서방향을 비롯한 지역간의 내부 연결도로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표시하고 있으며, 거리도 이수(里數)로 표시하고 있다. 도로의 표시는 실제와 같이 곡선으로 표시하는 것이 상례이나 〈대동여지도〉에서는 각 지점을 연결하는 직선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것은 각 지점 간의 방위와 거리를 정확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작자의 의도가 표현된 것으로 본다. 최성환(崔瑆煥)과 김정호가 공동으로 편집한 〈여도비지(輿圖備志)〉에는 극고표(極高表)에서 각 지점의 위도와 경도, 강역표에서는 각 군현의 읍치에서 주위를 8방위로 나눈 인접 군현 경계까지의 이수, 수도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방위표, 도별로 정리된 도리표(道里標) 등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들은 바로 〈대동여지도〉 제작에 직접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의 제작에 바탕이 된 〈여도비지〉의 경도와 위도의 값은 실제 측량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미 작성된 지도에서 거리를 기준으로 산출된 수치일 가능성이 높다. 즉 실제의 경위도와 차이가 심하고 또 오차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각 지점의 경위도 측량이 되어 있지 않았으며, 김정호와 최성환 자신들이 우리나라 각 지점의 경위도를 실제 측량했을 가능성은 더욱 추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대동여지도〉는 오랫 동안에 걸쳐 수집한 전통적인 도리도표와 기존의 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증보한 지도이다.

현황

항간에 전해지는 김정호의 옥사설, 그리고 〈대동여지도〉와 목판을 압수당했다는 설은 근거없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판본인 관계로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보물 제850호 지정되어 있다. 목판 중 1매가 숭실대하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목판본 지도는 국립중앙도서관에, 필사본은 규장각 외 여러 곳에 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건설부 국립지리원 내에 김정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서소문 밖 약현성당 구내에 기념비가 1991년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