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Darius I
요약 테이블
출생 BC 550
사망 BC 486
국적 페르시아

요약 페르시아 역사에서 인정 많은 왕이자 최고 입법자로 평가받고 있다. 뛰어난 행정 조직과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유명하다. 몇 차례에 걸쳐 그리스 정복을 꾀했으나 BC 492년에는 폭풍으로 함대가 파괴되었으며 BC 490년에는 마라톤에서 아테네에게 패했다. 다리우스는 재위 초기에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해 강압 통치를 했다. 제국 내부 질서를 회복한 다음에는 국경 방비를 강화하고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원정에 힘썼다. 그는 이전 왕들이 정복한 땅을 굳게 지키고 영토를 더욱 넓혔다. 제국의 무역·상업을 증진시키기 위한 계획들을 추진하여 화폐와 도량형을 표준화하고 육로와 해로를 개척했다. 동일한 행정정책을 실시해 제국 안의 다양한 민족을 단합시키기 위해 힘쓰는 한편, 원주민의 종교적인 관습을 존중했다. 다리우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가운데 최대의 왕실 건축가였으며 재임 기간 지어진 페르시아 건축양식은 제국이 망할 때까지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왕위등극
  3. 제국의 강화
  4. 행정정책
다리우스 1세(Darius I)
다리우스 1세(Darius I)

개요

뛰어난 행정조직과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유명하다.

몇 차례에 걸쳐 그리스 정복을 꾀했으나 BC 492년에는 폭풍으로 함대가 파괴되었으며 BC 490년에는 마라톤에서 아테네에게 패했다.

왕위등극

다리우스 1세는 파르티아의 사트라프(총독)이던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 수 있는 주요한 당대 자료는 바로 그의 비문(碑文)인데, 특히 비시툰(베히스툰) 마을에 있는 비시툰 바위에 새겨진 비문은 3가지 언어로 되어 있으며, 다리우스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말해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크테시아스가 그의 즉위에 관해 쓴 글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분명히 비문을 따른 글이지만 전설과 결합된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다리우스와 공모자들이 그들 중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그들의 말[馬]에게 맡겨 결정하기로 했을 때, 다리우스는 그의 마부가 속임수를 쓴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젊었을 때 키루스 2세 대왕(BC 559~529 재위)으로부터 왕위를 노리는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받았다. 그뒤 키루스의 아들이자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캄비세스 2세와 함께 왕족 경호원으로서 이집트로 갔다.

BC 522년 여름 캄비세스가 죽자, 다리우스는 서둘러 메디아로 갔고 왕위를 차지한(BC 522.3) 캄비세스의 형제 바르디야(스메르디스)를 페르시아 귀족 6명의 도움을 받아 9월에 죽였다. 비시툰 비문에서 다리우스는 자신이 실제로 죽인 사람은 마기교도인 가우마타인데 그는 바르디야가 캄비세스에게 비밀리에 살해되자 바르디야로 행세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왕권 장악을 변명했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합법적인 왕권을 회복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자신은 왕가의 방계에 속했으며 그가 즉위한 당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므로 그는 왕위계승 서열 제1인자가 될 수 없었다. 현대 일부 학자들은 다리우스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우마타 이야기를 지어냈으며 살해된 왕은 키루스의 진짜 아들이라고 본다.

다리우스는 처음에는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해 강압 통치를 했다.

바르디야를 살해한 뒤 동방 속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제국을 뒤흔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수시아나·바빌로니아·메디아·사가르티아·마르기아나 등지에서는 대부분 키루스 집안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독립정부가 세워졌다. 바빌로니아는 2번, 수시아나는 3번이나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시아 내에서는 바르디야로 행세한 바히아즈다타라는 인물이 상당히 지지를 받았다.

다리우스의 군대는 소규모였지만, 이러한 반란들은 하나로 뭉쳐지지도 않았고 금방 수그러들었기 때문에 진압할 수 있었다.

비시툰 비문에는 19번 전투를 벌여 반란 지도자 9명을 무찔렀다고 나와 있으며 이들은 비문에 새겨진 부조에 포로로 묘사되어 있다. BC 519년 수시아나에서 3번째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 동방에서 왕권을 확립했고 BC 518년에는 이집트로 쳐들어가 복종하지 않던 이집트의 사트라프 아리안데스를 처형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충성하지 않던 사르디스의 사트라프인 오로이테스도 제거했다(메소포타미아).

제국의 강화

제국 내부 질서를 회복한 다음 다리우스는 국경 방비를 강화하고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몇 차례 원정에 나섰다.

BC 519년에는 카스피 해 동쪽의 스키타이족을 공격하고 몇 년 뒤에는 인더스 강 유역을 정복했다. 동부 트라키아와 게타이를 굴복시킨 뒤 BC 513년 도나우 강을 건너 유럽에 있던 스키타이족의 땅으로 진입했으나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후퇴하면서 초토화 작전을 썼기 때문에 그는 보급품 부족으로 원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소아시아 사트라프들은 트라키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에게 해에 있는 렘노스임브로스 섬을 손에 넣었다. 따라서 페르시아는 그리스로 가는 진입로를 확보했으며 해협을 통한 흑해 곡물무역 통제권도 갖게 되어 그리스 경제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 본토 사람들이 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에 대해 간섭하는 것을 막고, 페르시아가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 그리스 정복은 꼭 필요했다.

헤로도토스가 쓴 글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스키타이 원정 이전에 그리스 해안을 조사하려고 배를 보냈을 뿐 BC 499년이 되기까지는 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99년 페르시아의 지배에 대항해 이오니아인이 반란을 일으키고 테베와 에레트리아가 이오니아를 지원하자 다리우스는 이들 반란을 진압했다(이오니아 반란). 그뒤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정벌을 맡겼으나 함대가 아토스 산 근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파괴되자(BC 492) 원정을 포기했다.

BC 490년 메디아인 다티스가 지휘하는 부대가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주민을 노예로 삼았으나 마라톤에서 아테네 군에게 패배했다(마라톤 전투). 다리우스는 3번째로 원정 준비를 했으나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리스 원정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고 준비가 끝나기 전인 BC 486년에 죽었다.

행정정책

다리우스는 이전 왕들이 정복한 땅을 굳게 지키고 영토를 더욱 넓히기도 했지만, 그가 페르시아 역사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부분은 행정에 관한 문제였다.

그는 키루스 대제가 시작한 제국의 사트라프 관할구역(사트라프령) 조직을 완성했으며 각 속주의 연공세(年貢稅)를 확정했다. 그는 또한 제국의 무역·상업을 증진시키기 위한 야심만만하고 원대한 계획들을 추진하여 화폐와 도량형을 표준화하고 육로와 해로를 개척했다. 카리안다의 스킬락스가 이끄는 원정대는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이집트 나일 강 어귀까지 탐험했다.

다리우스는 이집트 왕 네코 1세가 시작한 듯한(BC 7세기) 나일-홍해 운하공사를 보수·완공했다.

다리우스는 동일한 행정정책을 실시해 제국 안의 다양한 민족을 단합시키기 위해 힘쓰는 한편, 키루스가 했던 것처럼 원주민의 종교적인 관습을 존중해주었다(종교적 관용). 카르가 오아시스에 아몬 신전을 지어 에드푸 신전이란 이름을 내렸으며 다른 성소들도 복구했다.

캄비세스 밑에서 일했던 이집트인 우드자호레스네에게 사이스 사원에 있던 의술학교를 재건하도록 허용했으며, 사트라프들에게는 원주민 사제들과 협의해 이집트 법률을 법전으로 만들도록 명령했다. 이집트 역사에서 그는 인정 많은 왕이며 최고 입법자로 평가받고 있다. 일찍이 키루스가 공포한 법령에 따라 BC 519년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도록 허락했고 또 키루스가 그리스인들의 성역에 허용했던 특권을 계속 인정해주었다. 한 페르시아 관리는 멘더레스 강의 마그네시아 근처에 있던 아폴론 신전 사제들에게 조공과 강제노동을 강요한 죄로 질책받기도 했다.

몇몇 권위있는 학자들은 다리우스의 종교적 믿음은 비문에 나타나 있듯이 조로아스터 교리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로아스터교가 페르시아 국교가 된 것은 다리우스 때문이라고 여긴다.

다리우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가운데 최대의 왕실 건축가였으며 그가 다스렸던 동안 이루어진 페르시아 건축양식은 제국이 망할 때까지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BC 521년에는 수사를 행정수도로 삼고 그곳에 요새를 복구했으며 알현실(아파다나)과 궁전을 지었다.

궁전의 주춧돌 비문에는 이 공사를 위해 다리우스가 제국 전역에서 어떻게 자재와 기술자들을 구해왔는가에 대해 나와 있다. 초기의 수도이던 파사르가다에 대신 그가 태어난 고장인 파르스(페르시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새로운 국왕 거주지를 만들었다. 요새·알현실·회의실·보물창고·궁전 등은 비록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지만 모두 그의 공적으로 볼 수 있고, 그밖에 엑바나와 바빌론에도 건물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