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발리스

노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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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72. 5. 2, 프로이센 작센 오버비더슈테트
사망 1801. 3. 25, 작센 바이센펠스
국적 독일

요약 후기 낭만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니더작센의 귀족계급에 속하는 신교 가문에서 태어나 가족이 전에 사용했던 이름 '노발리'를 본떠 자신의 필명을 붙였다. 청년시절 예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1790), 거기에서 실러와 사귀었다. 그뒤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며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과 친교를 맺고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793년 비텐베르크에서 공부를 마쳤고 1796년 바이센펠스에서 작센 정부 제염소의 회계 감사관으로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백과사전적인 연구, 관념론에 토대를 둔 철학체계 초안, 시작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의 생전에 출간되었던 단편집 〈꽃가루〉(1798)와 〈신앙과 사랑 〉(1798)은 그의 정신세계의 폭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세계를 우화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시·철학·과학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후기 낭만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니더작센의 귀족계급에 속하는 신교 가문에서 태어나 가족이 전에 사용했던 이름 '노발리'를 본떠 자신의 필명을 붙였다. 청년시절 예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1790), 거기에서 실러와 사귀었다. 그뒤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며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과 친교를 맺고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793년 비텐베르크에서 공부를 마쳤고 1796년 바이센펠스에서 작센 정부 제염소의 회계 감사관으로 임명되었다.

1794~95년 노발리스는 14세의 조피 폰 퀸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다. 그러나 그녀가 1797년 결핵으로 죽자 자신의 비애를 표현한 아름다운 시 〈밤의 찬가 Hymnen an die Nacht〉(1800)를 썼다. 이 운문 섞인 산문시 6편에서 노발리스는 밤, 즉 죽음을 신 앞에서 누리게 될 더 높은 삶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찬미하며, 자신이 죽은 뒤에는 조피와 전 우주가 신비하고 애정어린 합일을 이룰 것을 기대했다.

그는 1797년 광산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프라이베르크 아카데미로 갔다.

1798년 다시 율리 폰 카르펜티어와 약혼했고, 1799년 바이센펠스에 있는 제염소의 광산 조사관이 되었지만, 결혼하기 전인 1801년 결핵으로 죽었다.

말년에는 백과사전적인 연구, 관념론에 토대를 둔 철학체계 초안, 시작(詩作)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의 생전에 출간되었던 단편집 〈꽃가루 Blütenstaub〉(1798)와 〈신앙과 사랑 Glauben und Liebe〉(1798)은 그의 정신세계의 폭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세계를 우화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시·철학·과학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유명한 신화적 로맨스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 Heinrich von Ofterdingen〉(1802)은 이상화된 중세를 배경으로 젊은 시인의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탐구심을 그렸다. 그의 시에서의 중심적 이미지인 푸른 꽃은 동료 낭만주의자들 가운데서 널리 인정된, 낭만적 동경의 상징이 되었다.

노발리스는 〈그리스도교 세계:유럽 Die Christenheit oder Europa〉(1799)이라는 평론을 통해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운동으로 중세 때의 문화적·사회적·지적인 통일이 파괴되었던 유럽을 새롭게 회복할 보편적 그리스도교 교회의 설립을 요청한다.

그가 죽은 뒤에야 발표된 이 평론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향하는 낭만주의 세대의 동향을 확정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