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노량해전

다른 표기 언어 露梁海戰

요약 임진왜란 최후의 대규모 해전으로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이이었다.
1597년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한 일본은 11월 왜장 고니시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서 공격해 왔다. 200여 척의 배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은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여 포위되었던 명의 장수인 진린을 구하고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쓰러졌다. 이순신의 유언으로 그의 죽음은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알려졌다.
노량해전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량해전
노량해전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이자,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해전이었다. 1592년(선조 25)의 1차 침입에 이어 1597년에 다시 침략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그해 9월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하였으며, 지상전에서도 점점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고전하였다. 다음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일본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점차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과 함께 고금도 수군진영을 떠나 노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어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수행하여 왜교(倭橋)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고니시는 수륙양면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어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는 후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간청했다.

진린은 이를 받아들여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애원하는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도록 방조하고는 이 사실을 이순신에게 통보했다. 이에 이순신은 적을 너무 쉽게 놓아주었음을 보고 크게 노하여 진린을 꾸짖었다. 이순신은 고니시가 이 통신선을 이용하여 사천 등지에 나가 있는 시마쓰[島津義弘]와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소오[宗調信]에게 연락하여 이들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동공격하면서 퇴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조·명 연합함대의 진영을 재정비하여 쳐들어올 왜군에 대비했다. 과연 11월 18일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 집결하여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200여 척의 조·명 연합수군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이순신은 배가 넘는 적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모든 병사들에게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곧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들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다. 이때 진린의 명군이 와서 왜적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마지막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여 포위되었던 진린을 구했다.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전쟁과정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여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전사하여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알려졌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이외에도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홍양현감 고득장(高得藏) 등 많은 명장들이 사망했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거쳐 퇴각하여 시마쓰의 군사들과 함께 부산에 집결한 후 철수했다. 노량해전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