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고향방문단

남북한 고향방문단

다른 표기 언어 南北韓故鄕訪問團

요약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의 합의에 의해 각각 서울과 평양을 교환방문한 남북한 쌍방의 이산가족.

1984년 9월 북한측의 대남 수재물자제공 제의와 남한측의 수락을 계기로 재개된 남북대화는 1985년에 남북적십자회담·경제회담·국회회담 예비접촉·체육회담 등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12년 만에 다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은 5월 27~30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8차 본회담에서 "8·15해방 40주년을 전후하여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추진"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의 재회·상봉이 가능하게 되었다.

합의사항에는 50명의 고향방문단 외에 남북한 문화의 이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50명으로 구성된 예술공연단도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교환공연을 갖기로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실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이후 3차례의 예비접촉이 있었다. 여기에서 방문단 규모를 151명으로(단장 1, 고향방문단 50, 예술공연단 50, 기자단 30, 지원인원 20) 하고, 방문지역은 서울과 평양으로 국한하며 방문기간은 9월 20~23일로 한다는 구체적 사항들이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남북적십자사 총재(남한:김상협, 북한:손성필)들이 인솔하는 151명씩의 방문단은 9월 20일 판문점을 경유하여 서울과 평양에 도착했고, 곧바로 3박 4일간의 방문일정에 들어갔다. 이틀간에 걸쳐 이루어진 상봉에서 평양을 방문한 한국측 방문단 중에서는 35명이 41명의 가족·친척들과, 북한측은 30명이 51명과 재회했다. 한편 예술공연단도 9월 21, 22일 양일에 걸쳐, 서울예술단은 평양대극장에서, 평양예술공연단은 국립극장에서 각기 2회의 공연을 가진 뒤 23일 판문점을 통해, 각자 자기측 지역으로 돌아갔다.

남북한 고향방문단은 남북 당국자들의 공식적 합의 도출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이산가족상봉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이것을 계기로 인위적으로 갈라진 혈육의 정을 다시 이어야 한다는 전민족적 공감대가 널리 형성됨으로써 민족통일의 당위성을 새삼스럽게 불러일으켰던 사건이었다. 1992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7월 25일 남북적십자 제7차 실무접촉에서 북한측이 이인모(李仁模) 송환, 핵사찰 등을 트집잡아 사실상 무산되었다.→ 남북이산가족상봉, 남북적십자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