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

기정진

다른 표기 언어 奇正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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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8(정조 22)
사망 1879(고종 16)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조선 후기의 주자학자.

이학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 자는 대중, 호는 노사(蘆沙). 증참판 재우(在祐)의 아들이다.

7세에 이미 맷돌을 보고 시를 지었고, 9세에 경사에 통했다. 1831년(순조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康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봉직하지 않았다. 이후 40세 때도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했다. 그뒤에도 평안도도사·무장현감·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62년(철종 13) 삼남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철종은 3정의 개선책을 듣기 위해 언책(言策)을 모집했다. 이때 〈임술의책 壬戌擬策〉을 작성하여 사대부 풍속의 폐단, 조정의 공경·방백·수령·이속의 탐오함, 과거·사관(仕官)의 폐단, 부호들의 토지겸병의 폐단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군포의 혁파, 환곡의 면제, 민전 제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기했으나 제출하지는 않았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 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 丙寅疏〉를 올려 외적을 방비하는 대책을 건의했다. 그해 7월 동부승지·호조참의, 10월에는 동지돈녕부사·호조참판·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때 국가적 폐습을 비판하고 사대부에게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는 2번째〈병인소〉를 올렸다. 1877년 장성 월송(月松:지금의 고산리)으로 거처를 옮겨 담대헌(澹對軒)에서 문인들과 지내다 죽었다.

학풍

기정진은 경사자집으로부터 백가(百家)·예악·형정(刑政)·병기·천문·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성명이기(性命理氣)의 설(說)에 있어서는 이이(李珥) 이후에 많은 성리학자들이 신봉하던 주기설(主氣說)을 비판하고,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주리파 학자들과는 달리 이(理)와 기(氣)를 이원(二元)으로 대립시켜 이해하지 않고, 일원적(一元的)으로 기(氣)를 이(理) 속에 포함되는 분(分)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했다. 이에 유리론자(唯理論者)로 불려지면서, 송시열 계열과 대립했다.

한편 형이하의 기(器)인 과학기술을 양이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주장하며 기정진은 이항로(李恒老)와 함께 위정척사의 지주가 되었다. 서경덕·이황(李滉)·이이·이진상(李震相)·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이학의 6대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의 학문은 호남 전역에서 그 뿌리를 내려 김석구(金錫龜)·정재규(鄭載圭)·정의림(鄭義林) 등에 이어졌다. 손자 기우만(奇宇萬)은 가학(家學)을 이어받고, 1895년(고종 32) 전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6년까지 일본군과 싸웠다.

저서로는 〈납량사의 納凉私義〉·〈노사문집〉·〈답문유편 答問類編〉이 전하고, 1960년대 이후 〈노사연원록 蘆沙淵源錄〉·〈고산서원지 高山書院誌〉 등이 간행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