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개 조항

95개 조항

다른 표기 언어 Ninety-five Theses , 九十五個條項 동의어 95개 논제, 九十五個條 論題, 95개조 반박문, 95개조 의견서

요약 대사 문제에 관한 논쟁을 위해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성곽 교회인 슐로스키르헤 문(門)에 라틴어로 써서 붙인 글.

이 사건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루터는 당시 논쟁과 토론을 유도하는 관행을 따라 이 조항을 교회 문에 못박아놓았다. 이 글은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상황과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해 불과 몇 주 만에 독일 전체에 알려졌다. 루터는 이 조항의 복사본을 마인츠의 대주교와 브란덴부르크 주교에게만 보냈으나 다른 사람들이 이 글을 독일어로 번역·인쇄하여 퍼뜨림으로써 면죄부 사건에 관한 단순한 항의에서 그치지 않고 서방교회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대사란 죄에 대한 잠벌을 면해주는 것으로,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에서 교리로서 규정되었다.

이 대사는 교황의 권위로 수여되었고, 공인된 직원들을 통해 살 수 있었으나 대사가 하느님의 용서를 사고 팔 수 있다거나, 참회하지 않거나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유용하다는 것을 암시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중세기에 교황의 재정난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대사가 더욱 자주 발행되었고 남용되는 일도 흔해졌다.

게다가 교황 식스토 4세가 대사는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들에까지 효력이 있다고 말한 후에는 대사에 대한 오해가 더욱 깊어졌다. 대사 설교가들이 자주 지껄이던 이 터무니없는 말은 신학자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발표한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개축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대기 위해 대사를 발행한 일이었다. 독일에서 판매된 대사 수익의 절반은 비밀협정에 의해 마인츠의 대주교이며 선제후인 알베르트가 푸거가(家)에 진 막대한 빚을 갚는 데 전용되었다.

알베르트는 교황이 자신을 고위성직에 앉혀준 대가를 지불하느라 그 빚을 졌던 것이다. 그의 판매대리인 가운데 독일 담당인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요하네스 테첼이 자기가 팔고 있는 대사에 대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자 비텐베르크에서는 선제후 현명왕 프리드리히 3세가 대사 판매를 금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차라리 신자들이 모든 성인 성당에 자신이 수집·전시해놓은 성인들의 유품에 헌금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비텐베르크 교회 신자들은 당시 교회 가까이에서 설교하던 테첼에게 갔고, 그에게서 산 대사를 루터에게 보여주었다. 이에 루터는 신학상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격분하여 95개 조항을 썼던 것이다.

이 조항은 시안적(試案的)인 견해들이었는데, 그중 몇 조항에 대해서는 루터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조항들은 대사 문제에 관한 교황의 대권(大權)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교황의 정책을 비판하는 암시는 들어 있었다. 이 조항들에서 루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영적·내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거두어 로마에 있는 부유한 교황에게 보낸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는데, 이 점은 독일인들이 널리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이 억지로 로마에 돈을 기부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분개했었다.

이에 놀라고 화가 난 마인츠의 대주교가 결국 1517년 12월 루터를 제지시켜달라는 청을 담은 문서를 로마에 보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학자 한 사람이 루터의 글을 반박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1518년 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도미니코 수도회 청중들에게 발표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제기한 문제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을 알고 95개 조항에 대한 설명을 실은 장문의 라틴어 문서를 1518년 가을에 출판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날짜를 95개 조항을 붙인 그날로 보는 관행은 17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